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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 여성의 커리어 복귀가 예능 서사가 될 때 | 예능 소라와 진경

2026-05-27

문화 콘텐츠 속 여러 모양으로 빛나는 여성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10여 년 전, 연예부 기자로 일했다. 당시 예능판에는 남성 출연진이 주축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주를 이뤘다. 여성 출연자는 홍일점으로나마 얼굴을 비추면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면 남자 출연진으로 성공을 거둔 프로그램의 포맷을 빌린 아류를 여자 출연진으로 구성하는 것 정도? 당시 여성 출연자의 설 자리를 보장하지 않는 방송가의 행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강산이 변했는데 TV 안은 그대로인 듯하다. 여전히 지상파 방송국의 메인 시간대에는 남자 출연자가 이끄는 예능들이 포진해 있다.

이런 가운데 요새 관심을 끄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바로 일요일 밤 9시에 방영하는 MBC 예능 <소라와 진경>이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슈퍼모델 이소라와 홍진경이 데뷔 30여 년 만에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에 도전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긴장과 설렘, 현지 에이전시의 냉정한 피드백, 전 세계 20대 모델들 사이에서 ‘최고령 신인’으로 대기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잡아낸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단지 뭉클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정확히 건드리고 있어서.

이소라는 1992년 한국 최초 슈퍼모델 선발대회 우승자다. 홍진경은 이듬해인 1993년 같은 대회에 최연소로 출전해 베스트 포즈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 시대 패션계의 중심에 있었고,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방송계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대중에게 이소라와 홍진경은 진행자이자 예능인으로 더 익숙하다. 그 사이 그들의 기원이자 정체성 중 하나인 ‘모델’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러나 대중은, 심지어는 이소라와 홍진경조차 그 행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는 일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다. 여성이 나이 들면서 ‘원래 하던 일’을 조용히 내려놓는 것, 결혼과 출산 이후 커리어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라도 ‘본인이 원해서 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 이 흐름이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는 그게 문제라는 사실조차 잊고 만다.

<소라와 진경>이 흥미로운 건 바로 이 지점이다. 프로그램은 두 사람을 ‘과거의 영광에 취한 OB’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역으로 복귀하는 전문가’로 프레이밍한다. 훈련이 있고, 평가가 있고, 합격과 불합격이 있다. 감상적인 과거 회상 예능이 아니라 지금 이 시점의 도전으로 구성된, 게다가 주말 저녁 시간대 예능 자리에 4050 여성의 커리어 복귀를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니, 예능에서 모처럼 만나는 반가운 여성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방송 중 오래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홍진경이 후배 모델 한혜진에게 말한다. 파리 패션위크 도전을 앞두고 “예능인데 다 떨어져도 본전이라는 마음”이라고. 세계에 K-모델을 알린 선구자 격의 한혜진은 “썩어 빠진 마인드”라며 “그런 마인드로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방송 후 시청자들은 대부분 한혜진의 말에 손을 들었다. 선배를 향한 직언, 쓴소리, 팩폭. 편집의 문법도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잠깐 멈춰서 홍진경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그 말이 정말로 ‘절실하지 않아서’ 나온 걸까. 홍진경 역시 30년 전 두꺼운 포트폴리오 북을 들고 오디션을 뛰어다녔다. 모델로서의 성취를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무작정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 홍진경이 “다 떨어져도 본전”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정말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다. 감히 짐작컨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을 테다.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은, 중년 여성이 새로운 도전 앞에서 반복적으로 꺼내는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속뜻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

나는 또다시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무섭다.

20대의 도전과 중년의 도전은 맥락이 다르다. 20대에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람이 실패하는 것이다. 중년에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것은 한때 정점에 있던 사람이, 나이 든 몸으로, 다시 평가받고, 거절당하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갖는다.

그러니 홍진경의 방어적 언어를 단순히 ‘썩은 마인드’로 규정할 수 없다. 그보다는 중년 여성이 왜 도전 앞에서 먼저 자신을 낮추고, 결과를 미리 평가절하하고, ‘어차피 예능이잖아’라는 자기 최면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개인의 멘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십 년 동안 여성의 나이 듦에 사회가 보내온 신호의 축적이다. 나이 든 여성의 도전을 “대단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실패하면 “역시 무리였다”고 읽는 시선. 그 앞에서 홍진경의 방어적 언어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오랫동안 학습된 자기보호 반응이자 생존의 언어인 셈이다.

홍진경의 언어가 미래를 향한 방어라면, 이소라의 언어는 과거를 향한 고백이다.

방송에서 이소라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단체 패션쇼에 참가했을 때, 디자이너가 대놓고 “너 왜 이렇게 뚱뚱하냐”며 이소라를 쇼에서 빼라고 지시했다고. 그 말을 듣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울었다는 이소라는 스튜디오에서 “20대 초반에 저런 얘기를 들으면 평생 남는다”며 “살 빼는 게 끔찍해서 아예 이쪽(패션업계)을 떠난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최초 슈퍼모델 선발대회 우승자에게 향한 원색적 비난. 그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커리어를 조용히 끝냈다. 이 장면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소라의 고백은 한 개인의 상처담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패션 업계가 여성의 몸을 다뤄온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패션 산업은 오랫동안 ‘아름다움’이라는 명목 아래 여성의 몸을 특정 규격으로 재단해 왔다. 그 규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공개적으로, 거리낌 없이,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지적했다. 디자이너의 한마디가 모델의 커리어를 좌우했고, 그 평가를 피하기 위해 여성들은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이소라가 고백한 “2주 동안 하루 참치캔 하나로 버텼다”는 기억, “몸이 떨렸다. 나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다”는 공포는 이소라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런웨이를 걷는 수많은 여성들이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삼켜온 일상이다.

그 일상이 섭식장애와 거식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인의 의지 문제로, 혹은 직업적 요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동안, 수많은 여성의 몸과 마음이 손상됐다. 이소라가 “끔찍했다”고 회상하는 그 시절을, 업계는 그냥 ‘당연한 일’로 돌렸다.

이소라가 모델계를 떠난 것은 사실 패배가 아니다. 자신의 몸을 그 구조 안에 더 이상 맡기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다만 그 결정이 ‘자발적 은퇴’로 읽히는 동안, 그 결정을 강요한 구조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신 회차에서 이소라와 홍진경은 오디션의 기회를 얻었다. 이소라는 맨발로 워킹에 나섰고, 홍진경은 20cm에 달하는 킬힐을 신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각각의 결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말이 어떻게 나든 <소라와 진경>은 이미 해냈다. 중년 여성 두 명이 다시 ‘일하는 사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온 언어들이-홍진경의 방어적 발화도, 이소라의 트라우마 고백도-단순히 예능적 갈등으로 소비되지 않고, 무언가를 정확히 건드리고 있다는 것.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겹쳐 읽힌다. 홍진경은 거절당할 용기를 내지 못해 결과를 먼저 평가절하했고, 이소라는 이미 거절당한 상처를 안고 업계를 떠났다. 그 방어의 형태는 달랐지만, 뿌리는 같다. 여성의 몸과 나이와 커리어를 끊임없이 평가해 온 시선들, 그리고 그 시선이 내면화되는 과정.

우리가 <소라와 진경>을 통해 응원하고 있는 것은 비단 이소라와 홍진경의 모델 도전기만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의 구조 안에서 자신을 내려놓기를 결심한 여성, 지난날의 ‘나’를 되찾기 위해 한 발짝 데려는 모든 여성을 응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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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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