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일상이 게임 같다는 생각을 한다. SNS 광고에 속아 설치한 그런 게임 말이다. 비슷한 형식의 퀘스트를 깨고 또 깨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하지만 이런 게임은 아무리 퀘스트를 깨도 엔딩이 나오지 않고, 다음 레벨의 숫자만 한없이 올라간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투두리스트에 빼곡히 적힌 미션들을 하나씩 지워내도, 바로 아래 새로운 미션이 생겨난다. 마치 '투두리스트 총량 유지의 법칙'이라도 있는 듯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남들 다 휴가 가는 여름은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가을이 불쑥 나타났다. '이렇게 2025년을 보낼 순 없지.' 충동적으로 제주행 비행기를 끊은 이유다. 제주에서 보낸 가을 휴가의 테마는 '일시정지'. 24시간이 모자라다시피 돌아가던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흐르는 시간 속에 가만히 서 있기. 그 첫 번째 스폿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취다선이다.
취다선은 제주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만나는 오조리에 위치했다. 바다 건너 우도가 보이는 이곳은 ‘차(茶)와 명상(禪)에 취하다(醉)’라는 뜻을 담고 있다. 리조트 겸 웰니스 센터로, 숙박하지 않아도 다양한 마음챙김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날 경험한 프로그램은 원데이 마인드풀 티클래스. 90분 동안 잎차에 대한 기본 지식과 다기 사용법을 배우고, 차와 명상을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다. 가격은 1인 25,000원(리조트 숙박객은 1회 40분 무료). 회차별로 단 한 팀만 예약할 수 있어 완벽히 프라이빗한 환경이 보장된다.
찻잎이 건네는 고요한 인사
지하 1층 프로그램 공간은 나무 빛깔로 가득한 안락한 분위기다. 총 4개의 차실 중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통창 너머로 맑은 하늘과 초록 들판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서울에서는 종일 모니터와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던 눈에 이토록 근사한 자연을 보여줄 수 있다니. 벌써 기분이 상쾌해졌다.
안내자와 함께 시작된 30분간의 클래스는 섬세했다. 우선 눈을 감고 몸에 힘을 쭉 빼며 긴장을 해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질 다도를 좀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짧은 명상이 끝나면 잎차의 종류와 특징, 물의 온도와 우려내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차의 맛과 향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사무실에 상시 구비된 티백으로만 차를 접해온 에디터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다기를 다루는 법도 하나하나 배웠다. 찻주전자를 데우고, 찻잔을 따뜻하게 만들고, 찻잎이 물속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늘 빠르게,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데 익숙했던 에디터에게 이 느린 시간은 낯설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롯이 나를 위한 60분
30분의 클래스가 끝나고 안내자가 자리를 내어주자, 이제 차실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남은 60분 동안 배운 대로 차를 우려 마시고, 명상하고,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 시간. 안내문이 함께 제공되어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예약 시 선택한 차를 천천히 우려냈다. 에디터가 고른 차는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아준다는 흑차. 지리산의 명인이 채취한 찻잎을 수차례 덖고 발효해 풍미가 한층 깊고 그윽한 것이 특징이다. 차 특유의 쌉싸름함 끝에 달큰한 맛이 올라오며 부드럽게 넘어간다.
여러 번 덖은 끝에 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상태라 흑차는 티백에 담겨 나온다.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면 짙은 빛깔의 찻잎 조각들이 깊으면서도 맑은 차로 우러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첫 모금을 입에 머금었을 때 느껴지는 은은한 향과 깊은 맛.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경험이 아니라, 자연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창밖으로는 봄엔 유채꽃으로 가득 찼을 들판이 야생의 풀들과 야자수로 채워져 있었다. 적당히 부는 바람에 이파리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때로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다.
찻잎의 맑은 기운을 따라 내면으로 향해보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의 향이 코끝을 스치고, 내쉴 때마다 쌓여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찻주전자가 식어갈 무렵, 다시 한 번 차를 우려냈다. 같은 찻잎이지만 두 번째 우려낸 차는 또 다른 맛과 향을 선사한다. 차를 우릴 수 있는 물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한 번으로 그치지 말고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차가 풍기는 다양한 맛과 향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일상으로 가져갈 평온함
한 시간이 금방 흘렀다. 따뜻한 차가 온몸에 퍼진 덕분인지 흑차의 설명대로 몸과 마음의 중심이 잡히는 것 같았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은 이완되었고, 복잡하게 얽혀 있던 마음도 맑아졌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
취다선에서의 경험은 단지 제주 여행의 한 프로그램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곳에서 배운 차 한 잔의 여유를 기억하며 스스로 돌보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찻잎을 우리듯, 나 자신에게도 천천히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면서.
멈춤이 필요한 이들에게
바쁨에 쫓겨 자신을 돌볼 틈조차 없다면, 휴가도 못 가고 지내다 문득 공허함이 밀려온다면, 취다선을 추천한다. 제주의 자연 속에서 차 한 잔과 함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그 속에서야말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
취다선
주소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해맞이해안로 2688 취다선 지하 1층
문의 0507-1390-1600
예약 https://naver.me/5EUZRBa1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취다선, yeyeg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