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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 | 영화 세계의 주인

2025-12-04

문화 콘텐츠 속 여러 모양으로 빛나는 여성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 이 칼럼은 영화 <세계의 주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읽기를 추천합니다.

열여덟 살 이주인은 사랑도, 우정도 매사에 열심인 ‘갓생러’다. 쉬는 시간이면 학교의 으슥한 곳에서 남자친구와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교실에선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친구와 두루두루 어울린다. 방과 후엔 태권도장에 나가 심신을 단련하고, 주말에는 청소 봉사도 꾸준히 나간다. 그 뿐인가, 집에선 유치원을 운영하느라 바쁜 엄마를 챙기고, 초등학생 동생도 살뜰히 보살핀다.

이쯤되면 <세계의 주인>이란 영화 제목이 <세계의 끝판왕>이었나 싶은데, 그만큼 이 세계에서 주인은 기특한 딸, 든든한 누나, 성실한 제자, 재미있는 친구이자 사랑스러운 애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주인공으로서의 스탯이 몰빵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의 세계에 금이 간다. 같은 반 친구 수호가 주도하는 성범죄자 거주지 제한 서명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서부터다. 서명지에 적힌 한 문장이 주인의 마음에 걸린 탓이다.

성폭력은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기며,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는…

주인은 이 문장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수호는 주인이 가해자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범죄의 심각성과 피해자에게 남았을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받아친다. 입장 차이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결국 주인은 참았던 말을 내뱉는다.

“그래, 나도 성폭행 피해자다! 그래서 뭐, 내 인생 완전 망가진 것 같냐?”

 

다시, 열여덟살 이주인은 사랑도, 우정도 모든 게 어렵다.

좋아하는 남자친구와의 스킨십은 어렵고, 그 탓에 연애가 오래 가지 못한다. 앞에선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주인을 두고 ‘가볍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속상하다. 삼촌이 주인에게 저지른 일을 알고 죄책감에 집을 나간 아빠, 그런 아빠 대신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돌보느라 지친 엄마를 떠올리면 모든 게 제 탓 같이 마안하다가도 왜 그때 저를 지켜주지 못한 건지 원망하는 마음도 올라온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거의 중반부가 지나서야 주인의 비밀을 관객에게 완전히 드러낸다. 그 순간, 이 세계가, 그리고 스크린 너머의 우리가, 얼마나 피해자다움(victimness)이란 편견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되묻게 한다.

극중 주인은 태권도 선배 미도를 멘토처럼 따른다. 미도 역시 친족 성폭행 피해 생존자로, 주인과 청소 봉사 모임을 함께 나가는 동료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난한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증인석에 앉은 미도에게 피고 측 변호사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같이 ‘피해자답지 않았던 순간’들을 겨냥한다. 사건 당일, 어떻게 태권도 대회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는지, 메달을 따고 어떻게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지, 왜 가해자에게 용돈을 요구했는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세계로부터 ‘피해 주장자’가 아니라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피해자다움’의 인증 요청을 통과해야 한다.

주인이 멘토로 여길 만큼 올곧고 단단한 성격을 가진 미도조차 법정에선 변호사의 질문 폭격에 점점 말문이 막히고 끝내 울먹인다. 온통 차갑고 딱딱한 것들로만 채워진 공간 한 가운데서 미도의 작은 몸이 들썩이는 장면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끝내 소진시키는 것이 피해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 그 이후의 세계,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냉담한 시선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주인>이 주인과 미도의 삶을 들여다 보고, 관객에게 전하는 방식은 분명 그 가치가 남다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성폭력을 다룰 때 사건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거나, 피해자의 삶을 극단적으로 파고드는 데 집중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주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재연하지 않는다. 작품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주인들에게 주어진 지금과 앞으로의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명하다. 피해 생존자를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 태권도장에서 땀을 흘리고, 친구들과 웃고, 남자친구와 사랑하고, 가족을 챙기며 보내는 하루하루. 그 일상의 축적이 주인을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주인으로 만들어간다.

주인은 망가지지 않았다. 타고나기를 긍정적인 성정 덕분일 수도 있고, 오래 묵은 것들을 깔끔히 씻어내는 청소 봉사 모임에서의 연대 덕분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인은 무너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고작 그런 일 따위로, 이 세계 주인들의 인생과 영혼은 파괴되지 않는다.

  • 에디터
    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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