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의 단절을 부른 팬데믹 시대에 역으로 특수를 누린 산업이 있다면, 반려 가전 시장이다. 실제로 미국의 리서치 회사가 실시한 ‘섹슈얼 웰니스 제품 시장 세분화’ 연구에 따르면 2021년의 섹슈얼 웰니스 산업의 규모는 1억 2,170만 달러를 달성했다. 다가오는 2028년까지 2억 2,250만 달러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음지에서 양지로, 더 나아가 시장 경제를 주도할 사업으로 떠오른 반려 가전 업계의 오늘과 내일, 그 트렌드를 정리한다.
#여성주도적
근 몇 년간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성 중심 브랜드들의 성장이다. 단순히 여성이 사용하는 섹스 토이가 많다는 뜻이 아니다. 여성 CEO가 운영하고 여성 디자이너가 설계하며, 여성 엔지니어가 개발하는 여성용 반려 가전이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여름 론칭한 세르(Cerē)는 초음파 기기 전문가인 킴벌리 로비가 엔지니어로서, 산부인과 의사와 함께 설립한 섹슈얼 웰니스 브랜드다. 여성의 오르가슴 격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부학적 관점에서 만든 반려 가전을 선보이고 있다.
자위에 대한 선택을 여성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 올해 출범한 프레야(Freya)는 여성 주도 스타트업이다. 프레야에서는 목표에 걸맞게 일상적인 셀프 케어와 자위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올인원 반려 가전을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마찬가지로 CEO부터 자문단까지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브랜드 타부(Tabu)는 철저히 여성의 시각에서, 시장이 주목하지 않았던 사각지대의 여성을 위한 섹슈얼 웰니스 아이템을 만든다. 갱년기 여성을 위한 반려 가전을 개발한 것. CEO인 나탈리 왈츠는 어머니와의 대화 중 여성이 나이 듦에 따라 찾아오는 신체 변화로 성적 만족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타부를 구상했다고 한다.
이러한 스타트업의 등장 뒤에는 이미 업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여성 주도 기업들이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주연 배우인 다코타 존슨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하고 있는 모드(Maude)부터 올해 7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받고 제품 라인업을 확장한 데임 프로덕츠(Dame Products), 한국계 미국인 안나 리가 세계 최초 스마트 바이브레이터를 제작해 화제를 모았던 라이오네스(Lioness) 등이다.
#패셔너블
섹슈얼 웰니스의 개념을 일상의 경험으로 만들자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반려 가전의 스타일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하되 패셔너블한 포인트를 심어두는 것. 이를 위해 실제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한 사례도 있다.
데님 패션을 대표하는 브랜드 디젤(Diesel)은 올해 하이테크 섹스 토이 브랜드 렐로(LELO)와 협업해 눈길을 끌었다. 이를 통해 렐로의 베스트셀러인 바이브레이터 소나 크루즈(SONA Cruise), 콕링 토르(TOR 2)가 디젤의 아이덴티티가 적용된 새로운 옷을 입었다.
또 캐나다의 여성향 포르노 플랫폼 벨레사(Bellesa)는 팝스타 데미 로바토와 만나 특별한 반려 가전을 선보였다. 데미 완드(Demi Wand)로, 발랄한 옐로 컬러가 인상적인 바이브레이터는 마치 에어팟을 닮은 충전 케이스를 함께 구성하여 스타일과 기능을 동시에 잡았다.
반려 가전에 스타일을 더하는 데 앞장선 브랜드로는 텐가(TENGA)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남성용 반려 가전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텐가는 여성의 신체를 모방하지 않는 디자인으로 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양한 아티스트 및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며 반려 가전업계의 패션 아이콘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라이브 드로잉 아티스트 고(故) 김정기 작가와 협업한 유니버스(UNIVERSE) 컵 세트를 출시하기도 했다.
한편 가장 최근에는 지난달 새티스파이어(Satisfyer)가 패션 브랜드 네이키드(NA-KD)와의 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새티스파이어의 시그니처 바이브레이터 6종에 새로운 색깔을 입혀 선보인 것. 이번 컬렉션은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출시됐다.
#지속가능한
올해 전 세계의 화두는 단연 환경 문제였다. 지구를 덮친 이상기후로 환경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은 ‘친환경’에 눈을 돌렸다. 반려 가전 산업도 마찬가지다. 이미 이름 있는 브랜드들은 인체에 무해한 소재를 사용하면서 동물이나 지구 환경에도 해를 입히지 않는 방식으로 반려 가전을 제작하고 있는 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리사이클링 반려 가전을 선보이는 브랜드들이 있다.
덴마크의 오션(ohhcean)은 세계 최초 해양 폐플라스틱으로 반려 가전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반려 가전’의 새 장을 열었다.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뚜껑을 수집, 반려 가전 부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과립 과정을 거치는 식이다(몸에 닿는 본체 표면은 인체에 무해한 실리콘으로 제작되며, 폐플라스틱은 내부 부품에만 사용된다). 이 방식으로 만든 바이브레이터 3종이 출시된 상태다.
리사이클링한 메탈로 반려 가전을 만드는 영국 브랜드 러브 낫 워(Love Not War)도 있다. 러브 낫 워의 섹스토이는 본체뿐만 아니라 패키지까지 친환경 접착제, 콩 잉크, 종이 포장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더 그린 프로덕트 어워드(The Green Product Award)에서 수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반대로 폐기되는 반려 가전을 리사이클링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브랜드들도 등장했다. 미국의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로즈 인 굿 페이스(Rose In Good Faith)는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불량 섹스 토이, 판매되지 못한 섹스 토이 샘플을 재활용해 운동화를 만들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는 다양한 섹슈얼 아이템을 취급하는 어덜트 토이 메가 스토어(Adult Toy Mega Store)가 섹스 토이 리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주도하기도 했다. 고객이 사용한 섹스 토이를 깨끗하게 소독하여 반납하면, 여기서 실리콘, 플라스틱, 유리, 전기 회로판 등 부품을 분리하여 필요한 곳으로 전달한다.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이미지Cerē, Freya, Tabu, Maude, Lioness, Diesel, Bellesa, NA-KD, ohhcean, Love Not War, Rose In Good Faith Website, Demi Lovato Instagram
- 디자인박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