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욕 저하, 오르가슴 장애, 성교통이나 질 경련 등 성 기능의 이상으로 섹스가 즐겁지 않다는 여성이 많다. 더 큰 문제는 이것들을 ‘말 못 할 고민’으로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 건강에 관한 논의를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모든 여성이 즐거운 섹스를 향유할 권리에 대해 말하는 여성이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킨제이 연구소에서 성의학을 연수, 하버드에서 커플 치료 과정을 밟은 뒤 현재 부부의원을 운영하는 백혜경 박사다.
Q 킨제이 연구소에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남편(강동우 성의학 연구소장)의 의지가 컸죠. 성의학 불모지인 한국의 의사로서 이 분야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킨제이 연구소에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처음에는 거절당했어요. 당시 킨제이 연구소에 아시아 의사는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래도 집요하게 자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보내며 문을 두드린 끝에 펠로우십 허가를 받아냈죠. 사실 저는 정신과 레지던트를 막 끝낸 참이어서 내조하려고 갔었어요. 그런데 운이 좋게도 당시 연구소장이었던 존 밴크로프트(John Bancroft) 박사가 우리 부부에게 함께 연수받기를 제안하셨죠. 밴크로프트 박사도 아내가 심리학자로,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거든요. 성 기능과 관련한 문제는 대부분 커플의 관계를 기반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부가 치료하는 게 이상적이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성의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스터스 앤 존슨 연구팀도 부부였고, 미국에서는 의사나 심리학자 부부가 한 팀으로 섹스 테라피를 하는 경우가 많아요.
Q 성의학을 배워보니 어땠나요?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재밌었어요. 성 기능 장애의 치료, 섹스 테라피의 다양한 형태를 배우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성에 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정량화된 연구 결과로 확인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Q 어떤 연구들이요?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포르노와 로맨스 영화에서의 에로틱한 장면, 그리고 성적인 장면이 포함되지 않은 영상을 각각 보여주고 성적으로 흥분하는 정도를 측정한 연구가 있었어요. 결과를 보면 남성은 포르노로 인해 흥분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요. 반면 포르노를 보고 흥분한 여성은 30%도 채 안 되었죠. 여성은 대부분 로맨스 영화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남성은 시각적인 자극에 쉽게 흥분하고, 여성은 그보다는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시사해요. 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는 연구로, 2만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섹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를 조사한 리포트가 있었는데요. 남성의 답변 중 1위는 ‘나의 만족’ ‘나의 쾌감’이었어요. 그렇다면 여성은 어떤 답변이 가장 많았을 것 같나요? ‘파트너와의 관계’였어요.
Q 성별의 차이가 확연하네요.
연수받는 동안 환자들을 진료하고, 임상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는데요. 이를 통해 여성의 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남성은 성을 조절하는 스위치가 하나지만, 여성은 너무 많은 거예요. 만족스러운 섹스를 위해 여성에게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대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중요하고, 생리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신경 써야 하죠. 섹스 직전의 분위기나 기분도 영향을 미치고요.
Q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이 여성의 성인 것 같아요.
그래서 여성의 성 문제를 해결하려면 훨씬 많은 작업이 필요해요. 의학적인 치료가 중요한 만큼 커플 간의 애착이나 정서적인 안정감을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사회적인 인식도 개선되어야 해요. 이를테면 우리나라는 출산 후 성욕을 잃었다는 여성이 많은데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신사임당 신화’의 영향이 있다고 보거든요. 사회가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 엄마의 역할에 집중하기를 강요하잖아요. 지나치게 모성을 강조하고 자녀의 성공이 엄마의 성적표인 것처럼 말해요. 기혼 여성에 대한 성 역할이 고정되다 보니 정작 성인 여성으로서 성생활에 대한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죠.
Q 그런데도 성 문제와 관련해서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는 여성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성에 관한 문제는 친한 친구한테도 말하기 쉽지 않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니까요. 특히 여성은 대부분 혼자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식으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요.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의 성은 복잡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케이스를 보고 따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요. 되도록 전문가와 함께 해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죠.
Q 여성 환자와 남성 환자를 비교한다면요?
남성은 발기가 안 되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거든요. 그런데 여성은 성욕이 없거나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 해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상한 일이죠? (웃음) 여성은 섹스를 주도하기보다 남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반응만 하면 된다는 사회적 인식 탓이라고 봐요. 우리 병원에도 자기 의지로, 스스로 필요를 느껴서 오는 여성보다 파트너 때문에 왔다는 여성이 더 많아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거나 사귀는 남자친구마다 금방 헤어지는 게 자기 탓인 것 같다면서 말이죠.
Q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하지만, 여성 자신도 성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요. 여성 성욕저하장애 치료제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여성판 비아그라’는 완벽한 성공작이 탄생하기 쉽지 않아요. 남성을 위한 경구용 발기부전 치료제와는 메커니즘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남성도 심인성 발기부전은 비아그라로 치료할 수 없어요. 그런데 여성의 성욕 저하는 아까도 말한 것처럼 심리적인 문제나 상대와의 관계 문제로 인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호르몬을 조절하는 치료제로는 성욕 항진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Q 성 건강에 관한 논의가 양지로 올라오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다행히도 요즘 젊은 세대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이에요. 성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하루빨리, 안전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 기능의 본질이 아닌, 성기의 외양에만 집중하는 분위기는 바뀌어야 해요. ‘이쁜이 수술’로 불리는 질 성형이나 시술을 지나치게 과대포장하고 유도하는 것. 여성의 성기가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해당 수술이 외양만 바꾸는 게 아니라 성 기능 개선에 도움을 주는 케이스도 있지만, 문제의 원인이 다른 데 있는데도 질‘성형’에만 국한되어선 안 돼요. ‘이쁜이 수술’이라는 명칭부터 우리의 인식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반증하죠.
Q 성 기능 문제로 섹스가 즐겁지 않은 여성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요?
섹스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예요.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여전히 여성은 ‘수동성’을 강요당해요. 그래서인지 섹스도 여성이 해야 하는 의무처럼 생각하는데요. 원치 않는 섹스, 아프거나 괴롭기만 한 섹스는 하지 마세요. 내가 주도적으로 즐길 수 있는 섹스를 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성 기능에 문제가 있어 즐거운 섹스가 불가능하다면, 적절한 치료를 통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여성에게 섹스라는 것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박기동, Shutterstock
- 디자인박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