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여성 질환에 관해 공부할 때마다 끝내 마주하고야 마는 문장이다.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여전히 여성 건강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많은 여성이 자기 몸, 맘, 성의 변화에 무감하고, 분명한 통증에도 병원에 가기를 꺼리며 잘못된 정보에 의존하는 이유일 테다. Doctor’s Say는 “이런 일로 병원에 가도 될까?” 혼자 끙끙 앓는 여성들을 위해, 렛허와 조현희 산부인과 전문의가 절대 사소하지 않은 여성 건강 가이드를 제안한다.
파트너와의 관계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팬티에 선명히 묻어난 붉은색. 달력을 확인해 봐도 아직 생리를 시작할 날짜가 아니다. 여성은 그 순간 오만 가지 생각에 휩싸인다.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착상혈인 걸까? 그날 콘돔을 제대로 착용했던가, 제대로 착용했다면 혹시 콘돔이 터졌던 건 아닐까, 콘돔을 빼는 과정에서 정액이 흘렀던 건 아닐까? 만일 피임약을 믿고 콘돔을 착용하지 않았다면 피임약이 잘못된 걸까, 피임약 먹는 시간을 놓쳤던 걸까?
임신 계획이 없는 여성 중 대부분은 관계 후 생리가 늦어지거나 혹은 생리 주기가 아닌데도 속옷에 묻어난 피를 보면 가장 먼저 임신 가능성을 걱정한다. 포털 사이트에 ‘착상혈’만 검색해도 ‘생리와 차이’ ‘배란혈과 차이’와 같은 문구가 연관 검색어에 나란히 뜨는 것은 수많은 여성이 관계 후 출혈에 임신 가능성을 염려한 결과이다.
지난 시간, 렛허는 조현희 청담산부인과의원 원장과 함께 여성의 질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분비물에 관해 알아봤다. 그중 흔히 ‘피가 비친다’고 표현하는 갈색 분비물은 배란혈이거나 임신 초기 착상혈일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 연장선에서 관계 후 나타날 수 있는 출혈의 경우의 수를 알아보고, 각각의 출혈 혹은 피가 섞인 분비물의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본다.
착상혈 VS 배란혈 VS 생리혈
관계 후 출혈의 또 다른 가능성
✔ 관계 중 상처 : 질 내부가 충분히 젖지 않은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안쪽을 자극하거나 섹스토이를 삽입해 움직이는 경우, 마찰이 일어나며 질 내부에 상처가 생기면서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 자궁질환 : 관계 후 출혈은 자궁경부암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다. 이밖에 자궁경부용종, 자궁경부염, 위축성 질염 등을 의심할 수도 있다. 특히 위축성 질염은 여성 호르몬이 부족하거나 모유 수유 중, 자궁내막증으로 호르몬을 치료하는 중에도 나타날 수 있다.
Doctor’s Say
관계 후 나타나는 출혈에 관한 여성들의 고민과 질문을 모았다.
먼저 착상혈과 배란혈, 생리혈 각각의 특징을 설명하자면 우선 배란혈은 배란기에 나오기 때문에 주기상 다음 생리 예정일 기준 14일 전에 나옵니다. 그리고 달걀 흰자같은 분비물과 함께 선홍색 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생리혈은 주로 검붉은 색을 띠는데요. 자궁에 근종이나 용종이 있으면 선홍색으로 나오기도 하므로 색깔로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착상혈 역시 대개 연한 붉은 색의 피가 살짝 나오는 형태이지만, 유산기가 있는 경우에는 색이 진해지거나 양이 많기도 하므로 착상혈과 배란혈, 생리혈을 육안으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착상혈이 나왔다고 곧바로 임신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임신 테스트기는 혈중 임신호르몬 수치가 일정 기준 이상 올라가야 양성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착상혈이 나오고 일주일 후부터는 대부분 임신 테스트기에서 양성으로 표시되니 일주일 기간을 갖고 다시 임신 테스트기롤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착상혈이 나오고 생리도 멈췄는데 임신 테스트기 결과는 계속 음성이 반복된다면 병원을 방문해서 초음파와 혈액 검사를 받아봐야 합니다.
자궁 출혈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자궁내막이나 자궁근육층의 질병, 난소 낭종 등도 출혈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죠. 따라서 섣불리 자가 진단을 하지 마시고 병원에 방문해 정확한 진단을 받아 보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개 특별한 임상 증상 없이 출혈이 발생하고, 간혹 하복통이나 묵직한 느낌, 찌릿한 느낌 같은 것이 동반될 수는 있습니다. 출혈의 양이 많을 수록 통증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가 아프지 않다고 해서 질병이 없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관계 후 외상이 아닌 출혈이 나타났다면 초음파로 자궁과 난소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외부 자극으로 인한 출혈은 질이나 자궁경부에서 발생합니다. 피의 양이 적은 경우 저절로 멈추기도 하지만, 간혹 질이나 자궁경부 쪽 혈관이 많은 부위가 찢어지면 출혈의 양이 아주 많을 수도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이런 때는 병원에서 상처 부위를 봉합하거나 혈관을 소작기로 지져 치료해야 합니다. 물론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관계를 해서는 안 되며, 목욕탕이나 수영장과 같은 공공 시설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애액의 분비량이 적은 이유가 전희의 부족이라면 파트너와 대화를 통한 조율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전희를 충분히 했는데도 애액 분비 자체가 적어 통증이 생길 정도라면 윤활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갱년기가 가까워지는 여성의 경우, 여성 호르몬이 감소하면서 애액 분비량도 함께 줄어들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관계 시 통증을 느껴 관계 자체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호르몬 치료나 질정을 통한 여성 호르몬 보완 등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에 따라 적확한 처방이 다르므로 병원을 방문하여 상담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조현희
산부인과 전문의
자궁 난소질환 로봇수술의 권위자.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로봇수술센터장을 거쳐 현재 청담산부인과의원 로봇수술센터를 맡고 있다. 산부인과 교과서에서조차 ‘원인 불명’으로 치부하는 여성 질환의 근본을 파고들기 위해 오래 연구한 끝에 최근 <환경호르몬과 여성질환:자궁·난소·유방 질환 재발 방지 생활요법>이라는 책을 펴냈다.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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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손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