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 볕 잘 드는 어느 골목에 호기심 많은 어른을 기다리는 ‘이상한 나라’가 있어요. 바로 섹슈얼리티 브랜드 셀렉트숍 피우다입니다. 2017년 처음 문을 연 이래 많은 여성에게 성(性)에 관한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온오프라인 공간으로 사랑받은 피우다가 최근 매장을 새로 꾸몄습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콘셉트로, 섹스토이와 성 생활용품부터 성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셀프 스터디존까지 알차게 구성했는데요. 이번 Let Her SPEAK에서는 피우다의 브랜드 비주얼을 담당하는 장도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만나 단순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숍만이 아니라 섹슈얼리티 복합 공간을 꿈꾸는 피우다의 미래에 관해 들어봤어요.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피우다에서 크리이에티브 디렉터로 일하는 장도호입니다. 피우다에서는 2018년도부터 일했습니다. 처음에는 단발성으로 온라인 스토어 리뉴얼을 도와드리려고 왔다가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웃음)
성인용품 쇼핑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무슨 일을 하나요?
온•오프라인 통틀어 시각적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까지 담당합니다. 매장에서 행사가 있으면 포스터도 만들고, SNS에 업로드할 영상도 편집하고요. 현재 피우다에서 필요한 이미지들은 거의 다 제가 만들고 있어요.
정말 무엇이든 만들어내는(create) 사람이군요. 잠깐 언급한대로 피우다는 온•오프라인 공간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데요. 단순히 성인용품을 판매만 하는 쇼핑몰이 아니라고요.
피우다는 성 생활용품도 판매하지만, 섹슈얼 웰니스를 주제로 한 여러 이벤트를 여는 공간이기도 해요. 성생활 관련 책이 출간되면 북토크를 열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범위가 좀 더 확장됐어요. 요가 클래스도 진행하고, 여성 사업가들을 위한 플리마켓도 열면서 복합적인 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피우다 매장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리뉴얼하면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고요?
리뉴얼하기로 결정하고 콘셉트를 정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이미지가 여성이 호기심을 갖고 탐험하는 것이었어요. 마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잘 맞더라고요. 여기에 피우다는 한국만이 표현할 수 있는 미적 요소를 더했어요. 바로 절제와 관용인데요. 성에 관한 호기심과 탐험, 그리고 절제와 관용의 덕목을 접목하면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또 피우다 매장이 이태원에 있다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방문하는데 그들에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이런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인테리어가 바로 통유리 뒤에 걸린 병풍 이미지인데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관을 동양풍으로 재해석한 이 병풍도 직접 그렸죠?
시간 날 때마다 태블릿 PC에 틈틈이 그려서 완성한 거예요. 마침 그 즈음 동양화 그리기에도 관심이 있었거든요. 다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그린 것은 아니라 고증이 잘 안 돼서 부끄럽네요.(웃음)
공간을 직접 기획하고 꾸민 사람의 입장에서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포인트가 있다면요?
셀프 스터디존이에요! 공간을 처음 기획할 때부터 다같이 생각한 건데요. 사람들이 피우다에서 물건만 사고 나가는 게 아니라 카페처럼 앉아서 책도 읽고 오래 머물다 가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만든 게 셀프 스터디존이죠. 보면, 저희가 피우다를 운영하면서 참고했던 여성학 관련 도서들, 피우다언니가 쓴 책들이 있어요. 또 섹스 빙고나 포지션 카드 같은 게임용 카드 샘플들도 있으니, 오시는 모든 분들이 이 공간을 많이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피우다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에는 지인의 소개를 통해 인연이 닿았어요. 아까 말한대로 온라인 쇼핑몰 리뉴얼을 잠깐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데는 운명적인 통함이 있었겠죠? 피우다는 성인용품을 판매하기 이전에 섹슈얼리티와 다양성에 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브랜드이기도 해요. 피우다에 들어오기 전에도 관심 있던 분야인가요?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피우다에 들어오기 전에 한참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 있었어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수면으로 떠오른 여성의제들을 실존주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데 특히 관심이 있었죠. 그래서 여성학 강의나 세미나를 자주 들으러 다녔어요. 그러면서 한국 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이 성적 자율성을 억압하는 성 보수주의로부터 탈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민이 주요 골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페미니즘 리부트 후 거의 10년이 지났는데요. ‘여성들이 성적 자율성을 억압하는 성 보수주의로부터 탈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지금 이 시점에 어디까지 이뤄진 것 같나요?
글쎄요, 사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느 쪽에 서서 보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요. 어느 정도는 진일보한 부분도 있겠지만, 여전한 부분도 있고. 어려워요.
과거에는 이 고민이 주요 골자는 아니었다고 했는데요. 피우다에서 일하면서는 좀 더 삶에 깊이 스며드는 고민이 되었을 것도 같아요.
맞아요. 특히 피우다에 방문하는 고객들과 이야기하면서 저 역시도 고민의 저변이 확장된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고객들이 생각보다 더 개인적인 혹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복합적인, 아주 내밀한 이야기들을 해주시곤 하거든요. 저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덕분에 고민해볼 수 있었죠.
이를테면?
음, 저는 모든 질문이 스스로에게 회귀되는 사람인데. 정체성에 관한 고민들이 특히 그랬어요..
피우다의 콘텐츠를 만들 때는 어떨까요? 워낙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 보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고민도 깊을 텐데요.
피우다 콘텐츠를 기획할 때는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피우다가 하려는 이야기가 대부분 지나치게 이론적이거나 무겁거든요. 피우다에서는 주로 성적인 행위를 건강 면에서 풀거나 어렵고 낯선 용어들을 모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 알려주려고 해요. 그렇다 보니 주로 의학적 용어를 쓰게 되는데 저만 해도 아직 어렵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자위에 관한 콘텐츠를 만든다면 자위가 갖고 올 수 있는 신체적인 효과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데 이때 생물학, 의학적 용어들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어 이걸 어떻게 풀어낼 지가 고민이죠. 그런데 그 무게를 덜려고 또 지나치게 자극적인 콘텐츠를 사용하는 건 일시적인 효과를 이끌어낼 순 있어도 장기적인 신뢰는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테고…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중용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피우다에서 일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이 있나요?
아니요.(웃음) 일하면서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어요. 저는 주로 밀린 설거지를 했을 때,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다음날 도시락 준비하고 잠들 때 뿌듯함을 느끼거든요. 하하. 일하면서 뿌듯한 마음이랄까요, 결과물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에 도취되는 걸 경계하는 편이에요. 제가 피우다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콘텐츠를 만들든 이건 ‘일’이잖아요. 선의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번 콘텐츠는 내가 정말 좋은 일을 했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순간, 자기 반성이나 고찰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조심하려고 해요.
와, 저와는 정반대네요. 저는 누가 렛허의 콘텐츠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해주면 하루종일 뿌듯해 하거든요. ‘그래, 이 맛에 글 쓰지’ 하고.(웃음)
하하. 저는 일을 할 때 나에게 그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시너지가 얼마나 좋은지, 이런 데서 동력을 얻어요. 피우다언니(강혜영 대표)와는 일적으로 아주 잘 맞아서 이만큼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것 같고요.
그럼 피우다에서 작업한 프로젝트 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무엇인가요?
맨 처음 맡았던 일이요. 피우다 온라인 쇼핑몰을 리뉴얼하는 일이었는데요. 그때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미 1년 정도 운영되었던 상황이라 입점된 제품은 너무 많고, 그런데 또 도매업체에서 제공하는 이미지는 사용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저희가 일일이 제품 이미지를 다시 찍었어요. 콘돔도 직접 손에 끼워서 다양한 각도로 촬영해 보고. 그런데 지금은 그 제품을 판매하지 않아요.(웃음) 물론 저만 한 일은 아니고요. 사진 촬영하는 친구도 있었고, 상세페이지 디자이너도 따로 있었어요. 다같이 해낸 일이라 더 재밌었죠.
앞으로 피우다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나요?
궁극적으로는 피우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목표가 있고요. 좀 더 소소하고, 물리적인 목표는 두 개가 있는데요. 우선 제가 요즘 동양화에 빠져 있어요. 피우다와 접목해서 섹슈얼리티를 재해석하는 기획 전시를 꾸려보고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수어를 배우는 거예요. 지금 유튜브로 독학하는 중이라 오래 걸리겠지만, 수어를 잘 배워서 피우다에서 성 강의나 행사, 이벤트를 열 때 배리어프리로 진행해 보고 싶어요. 제가 수어 통역을 하는 거죠. 멋있을 것 같지 않나요?(웃음)
Let Her SPEAK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항상 묻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여성의 성적 해방’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구구절절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요. 그래도 요약해서 말하자면, 여성으로서 죄책감을 벗어 던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이 갖는 성적 취향, 이를 테면 한 여자가 오럴이나 애널 섹스 같은 성행위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오럴, 애널 섹스는 여성의 건강에 유해하고, 여성으로서 그런 성적 취향을 갖는 건 남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적 판타지에 세뇌 당한 거야”라는 비판도 따라와요. 그런데 당사자가 그 행위로 하여금 ‘좋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학습된 것이라고 비난하고, 더 나아가는 하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나, 저는 요즘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해요.
내가 한 행동에 책임진다는 전제 하에 누군가의 성적 취향에 대해 세뇌라거나 억압당한 결과라고 단정 지어 판단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피우다에서는 누군가의 취향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것이 설령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 행복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다만 언제나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제안해 드리려고 하죠. 섹슈얼리티에 표준이란 건 없으니까요.
‘표준은 없다’는 말이 맞네요. 끝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나요?
완전 있어요! 여성 여러분, 지금 당장 마라탕과 엽떡을 끊고 운동을 하세요. 제가 그렇지 못한 삶을 살다가 뒤늦게 건강 관리를 하느라고 고생이거든요.(웃음)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요망진스튜디오
- 장소피우다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52길 5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