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부터 마치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쩌면 그 기묘하고도 찬란한 감정의 연결을 잊지 못해 혼자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전문서점 이스트씨네의 주인 오승희 대표가 해 뜨는 바다 정동진에서 1인 여성을 위한 북 스테이 영화로운 스테이를 시작한 계기도 이와 같다. 1,0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250여 명의 여행자와 만나 그만큼의 마음을 나누었다는 오승희 대표의 이야기를 들었다.
Q 영화전문서점 이스트씨네를 운영하다 영화로운 스테이까지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정동진으로 이주해 서점을 열기로 생각했을 때부터 북 스테이 운영을 염두하고 있었어요. 정동진이 여행지이기도 했고, 북 스테이를 통해 책과 영화를 매개로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서점과 스테이 오픈 사이에 시간 차이가 나는 건, 농어촌 민박 사업 조건에 맞춰 스테이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Q 영화로운 스테이의 공간을 꾸미는 데 가장 신경 쓴 것은 무엇인가요?
영화로운 스테이의 공간인 이스트씨네 2층은 실제 저희 부부가 사는 집이기도 해요. 그래서 게스트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분리된 느낌을 주고자 리모델링 공사를 했어요. 이를 위해 게스트가 단독으로 이용할 욕실을 따로 만들고, 주방과 거실로 이어지는 공간에도 가벽을 세워 타원형 입구를 통해 오갈 수 있도록 했죠. 인테리어 면에서는 밝은 화이트 톤으로 최대한 심플하게 꾸미되, 푸르른 식물들을 길러서 게스트들이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Q 영화로운 스테이는 1인 여성 전용 스테이입니다.
‘여성 전용’이란 표현보다 ‘여성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강릉을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하게 ‘쉼’을 경험하도록 우리 공간을 내어 드리고 싶었어요. 실은 영화로운 스테이를 시작하고 2년차까지는 모든 성별의 여행자들에게 열린 공간이었는데요. 아무래도 호스트인 제가 여성인지라 호스트와 게스트 모두 편하게 지내도록 여성을 위한 공간으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영화로운 스테이는 그저 잠만 자는 숙박의 공간이 아니라 호스트와 게스트가 함께 식사하고 서점에서 대화도 나누고, 또 영화를 추천하며 소통하는 공간이에요. 취향이 비슷한 여성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죠.
Q 영화로운 스테이, 이스트씨네는 ‘영화’와 ‘책’을 매개로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에요.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저는 혼자 영화를 보고 조용한 곳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내가 혼자 즐기는 일들을 ‘매개’로 타인과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낯설면서도 궁금했습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이야 말로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간이 너무 좋기도 하고, 때로는 일상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죠. 그런데 혼자 즐긴 영화와 책이 너무 좋을 때, 그 좋은 것들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태생적으로 ‘덕후’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해서 같이 즐기고, 이야기 나누는 것에 큰 기쁨을 느껴요. 실제로 영화로운 스테이에서 만난 인연들과 좋아하는 영화,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 안에서 각자의 일상과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게 되더라고요.
Q 영화로운 스테이에서 만난 인연 중 기억에 남는 여행객이 있나요?
영화로운 스테이를 운영하며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데요. 여태 20대부터 60대까지 나이는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가진 여성들과 대화하고 또 서로의 삶을 나눌 수 있었어요. 그 분들 모두가 소중하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모녀 여행객이에요. 어머님이 먼저 이스트씨네 공간을 알게 되어 딸에게 추천해 주셨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로운 스테이에는 따님이 먼저 방문해 주셨어요. 이후에 어머님이 신청해 주셨는데, 신청서에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라고 적어주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무척 반갑고 기뻤거든요. 엄마와 딸이 따로 또 같이 영화로운 스테이 공간을 좋은 추억으로 떠올려 주시면 좋겠네요.
Q 훌쩍 떠난 여행지에서 나를 위해 따뜻한 밥과 쉴 곳을 내어주고, 문학과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데서 영화로운 스테이 자체가 한 편의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 <안경>이라는 작품이 영화로운 스테이와 많이 닮아 있어요. <안경>에는 조용한 섬에서 만난 숙소의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각자 사색의 시간을 가지다 바닷가 해변에서 체조를 하는 모습들이 담겨있는데요. 그런 장면이 정동진에서도 펼쳐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물론 영화로운 스테이에는 체조하는 시간이 없지만요. 대신에 우리만의 방식으로 게스트와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고안한 것이 비건 식사를 함께하고 영화를 추천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정동진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비영리 단체에서 운영 매니저로 일했는데요. 치유 프로그램의 시작이 함께 밥을 먹는 일이었어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스럽게 지어준 밥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Q 영화로운 스테이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모두 비건 지향 메뉴인 것도, 환경을 위해 고민하는 요즘 여성들의 마음에 가 닿는 점 중 하나인데요. 식사를 준비할 때 특별히 고려하는 점이 있는지, 요리 솜씨도 자랑해 주세요!
우선 음식은 한 끼 먹을 만큼만 만들어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 제가 한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영화로운 스테이의 메뉴도 한식 위주로 준비하는데요. 재료들을 지역 시장에서 공수하는 터라 자연스럽게 제철 재료들을 활용하고 있어요. 저만의 장점이라면 요리를 빠르게 하는 편이에요. 보통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1시간으로 정해두고 있는데 그 안에 네 가지 반찬과 국까지 만들어내요. 게스트들 대부분이 남기지 않고 다 드시는 걸 보면 맛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요. 무엇보다 식사는 스스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준비하려고 합니다. 뭐든지 지나치면 오래 지속하기 어려우니까요.
Q 체크인부터 체크아웃까지 어떤 순서로 영화로운 스테이를 즐기면 좋을까요?
우선 이스트씨네 서점에 도착하면 저희가 2층 영화로운 스테이 공간으로 안내해 드리며 체크인을 진행합니다. 저희 부부는 대부분 1층 서점에 있기 때문에 게스트는 편하게 2층을 이용하면 돼요. 서점을 마감하는 5시부터 식사 준비를 시작해서요. 식사 시간은 대체로 6시쯤부터예요. 그 동안 게스트들은 보통 바다로 산책을 다녀오거나 방에서 책을 읽으며 쉬어요. 함께 저녁을 먹은 후에는 1층 서점 공간에서 대화를 나눠요. 처음에는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에서 연결되는 영화를 소개하죠. 게스트가 원한다면 혼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드려요. 물론 이 과정은 필수가 아닙니다. 게스트가 원하는 대로, 또 게스트의 컨디션에 따라 운영하고 있으니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돼요.
Q 매주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이스트씨네에서의 아침을> 정기 상영회도 운영 중이라고요?
보통 기획 상영회를 진행해온 터라 정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상영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스트씨네가 정동진의 일출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서점이니 이 시간을 활용하는 상영회를 기획하자 싶었죠. 그렇게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떠올리며 직접 구운 비건 빵과 커피를 함께 대접하는 아침 정기 상영회를 완성한 것이 <이스트씨네에서의 아침을>이에요. 유료 상영회라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요. 예약만 한다면 영화로운 스테이를 이용한 여행객도 참여할 수 있답니다.
Q 조금 무거운 이야기입니다만, 영화로운 스테이를 여성 공간으로 변경한다는 공지 이후 항의성 메시지, 악성 후기, 민원 등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최초에 민원을 제기한 분이 남성이었는데요. 개편 전에 영화로운 스테이를 이용한 여행자이기도 했어요. 앞으로 다시 이용하지 못한다는 데 화가 났는지 ‘성차별’을 이유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고 별점 테러를 하고, 여기저기 민원을 넣었더라고요. 하지만 영화로운 스테이는 저희가 살고 있는 집이기도 하잖아요? 더더욱 저 역시도 편안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공간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행인 점은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오히려 더 많은 여성들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영화로운 스테이를 찾아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Q 앞으로 또 영화와 책을 좋아하는, 혹은 저마다의 이유로 혼자 여행을 떠나온 여성들을 위해 시도해보고 싶은 기획이 있을까요?
강릉의 좋은 공간들을 소개하고 체험하는 여행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어요. 작년에도 1인 여성 여행자을 위한 예술 활동 여행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 참여자들의 만족도가 높았거든요. 앞으로도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이 여행지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그 안에서 예술 활동을 통해 각자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또 그 과정에서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여행 프로젝트를 기획하고자 합니다.
Q 영화로운 스테이를 통해 그리고 있는 미래가 있다면요?
먼 미래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저 오늘 방문하는 게스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게스트가 머무는 동안 쉼과 여유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제일 큽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를 그저 잘 살아내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어서요. 그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좋은 일들이 미래에 펼쳐지고 있으리라 믿어요.
Q 영화로운 스테이가 여성들에게 어떤 공간이기를 바라나요?
혼자만의 쉼과 여유를 느끼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그 쉼 가운데 책과 영화, 아름다운 바다와 자연이 함께하며 저마다의 ‘영화로운’ 순간을 이곳, 정동진에서 만나기를 바라요.
Q 영화로운 스테이에 초대하고 싶은 영화인이 있나요?
이스트씨네에는 영화관 의자가 10석이 놓여 있는데요. 의자마다 여성 영화 감독들의 이름을 새겼어요. 그중 2개 의자에는 이름이 적힌 감독들이 직접 방문하여 사인을 해 주셨어요. 언젠가 나머지 8석의 감독님들도 와 주신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감독님들에게 영화로운 스테이에서의 하룻밤도 꼭 선물해 드리고 싶고요!
주소 강원 강릉시 강동면 헌화로 973 2층
문의 이스트씨네 블로그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이스트씨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