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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타마라 드 렘피카인가 | 뮤지컬 렘피카

2026-04-09

문화 콘텐츠 속 여러 모양으로 빛나는 여성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르데코(Art Deco, 장식 예술)의 여왕’ 타마라 드 렘피카를 알고 있는가.

아마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익숙할 것이다. 녹색 부가티를 운전하는 여자의 자화상. 황금빛 장갑을 낀 손이 핸들을 꽉 쥐고 있고, 몽환적인 눈빛이 정면을 응시한다. 그림 속 렘피카는 말한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고, 당신이 비켜주지 않아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렘피카는 1898년 폴란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그는 생계를 위해 붓을 들었다. 그는 남성이 주도한 미술사에서 하나의 장르로 굳어진 여성의 누드를 즐겨 그렸다. 하지만 그가 그린 여성의 몸은 당시 주류였던 ‘남성의 시선’이 아닌, 철저히 ‘여성 자신의 시선’으로 담아낸 결과물이었다. 당대 예술계는 이를 파격적인 스캔들이라 불렀다.

강인한 생존력과 천재성, 그리고 동성(同性)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구설에 올랐던 삶.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필자 역시 공연장 의자에 앉기 전까지는 이 작품이 그저 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미화한 ‘성공 신화’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뮤지컬 <렘피카>는 그를 박제된 신화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다. 무대 위 렘피카는 때때로 이기적이다. 남편 타데우시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우선시하고, 딸 키제트를 사랑하지만 딸을 위해 꿈을 접는 ‘희생적 어머니’의 모습에 갇히지 않는다. 연인 라파엘라를 갈구하면서도, 그 관계가 가져올 사회적 파멸을 두려워하며 갈등한다.

흠결 없이 희생을 감내하는 성녀도, 관음적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는 뮤즈도 아닌. 그저 누구보다 원하는 것이 많은 여자, 그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자로 렘피카를 오롯이 그려낸 것이 바로 뮤지컬 <렘피카>의 차별점이다.

무대는 렘피카의 화풍처럼 선명하고 날카롭다. 거대한 철제 구조물은 근대의 상징인 에펠탑을 연상시키고, 강렬한 원색 의상은 아르데코 특유의 기하학적 미학을 구현한다. 단순히 시대 배경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렘피카의 회화 기법 자체가 극의 시각 언어로 치환되는 순간은 이 극의 백미다. 캔버스 속 인물이 무대 위로 걸어 나오고, 무대 위 피사체가 다시 그림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감각은 관객에게 ‘살아 움직이는 전시회’를 보는 듯한 전율을 선사한다.

그 캔버스 위에 오른 배우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 렘피카 역에 김선영, 정선아, 박혜나가 무대에 오르고, 연인이자 뮤즈 라파엘라는 차지연, 린아, 손승연이 연기한다. 극 중 두 사람의 친구이자 레즈비언 클럽을 운영하는 수지를 맡은 최정원과 김혜미까지,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여성 배우들이 총출동했다. 이 캐스팅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그간 여성 배우가 이토록 입체적이고 주체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로 한 무대에서 호흡할 기회가 드물었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폭발적인 가창력과 섬세한 연기는 100년 전 파리의 열기를 2026년 서울로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아르데코는 ‘장식적’이라는 이유로 순수 예술계에서 오랫동안 저평가받아왔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여류 화가’ 렘피카 역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렘피카>는 그 지연된 조명을 비추며 묻는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손으로 욕망을 그린 대가가 왜 ‘스캔들’이어야 했는지를.

작품은 렘피카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며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만약 실제 렘피카가 21세기 대한민국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을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미 100년 전, 자신의 그림이 결코 잊히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며 핸들을 꽉 쥐고 있었을 테니까.

뮤지컬 <렘피카>는 오는 6월 21일까지 서울 코엑스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공연된다.

  • 에디터
    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
    뮤지컬 〈렘피카〉공식인스타그램, 유튜브 채널
  • 그림
    《Autoportrait》(1929), 타마라 드 렘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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