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Her SPEAK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약자의 영웅이 아니에요

2024-07-30

지난 5월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갈비뼈>(감독 임하연)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참여한 작품입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영화에서 성적인 장면 혹은 배우가 신체를 노출해야 하는 장면에 대해 배우, 감독, 스태프 모두 안전하고 보호받는 환경에서 촬영하고 예술의 가치를 지키며 작품을 완성하도록 조율하는 직업입니다. 2018년 할리우드에서 시작해 현재 전 세계 100여 명의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활동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한 명도 없답니다.

그렇다면 <갈비뼈> 작업에 함께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누구일까요? 바로 Let Her SPEAK의 네 번째 주인공, 니시야마 모모코입니다. 2020년 미국 IPA(인티머시 전문가 협회, Intimacy Professionals Association)에서 교육 과정을 수료하고 미국, 일본 등에서 활동해 온 니시야마 모모코. 일본에서만 약 3년 동안 50편이 넘는 작품에 참여하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배우의 대변인’ ‘촬영장의 감시자’라는 편견에 맞서 왔다는 니시야마 모모코가 아시아에 더 많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한국에 왔습니다.

 

영화 <갈비뼈>를 통해 한국에서 첫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활동을 시작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우선 영화가 참 잘 만들어졌습니다. <갈비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KAFA 학생들이 감독과 스태프를 맡아 만든 졸업 작품입니다. 진솔한 자세로 참신한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느꼈습니다. <갈비뼈>에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소개로 참여할 수 있었는데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할을 필요로 하여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데서 영화에 대한 창작진의 진솔하고 깊은 태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아직 한국에서 낯선 직업 중 하나입니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인가요?

영화에서 배우의 신체가 노출되거나 성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장면에 대해 감독, 배우, 스태프 사이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정정하고 싶은데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영화 현장에서의 성차별이나 성폭력을 방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꼭 성적인 장면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면 온천을 하는 장면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관여하거든요. 물론 이 과정에서 성차별, 성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폭 넓은 역할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군요. 저 역시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2018년 미투(#MeToo)운동 이후 생겨난 직업이란 사실 때문에 다소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업계 종사자들조차 흔히 오해하는 지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감독들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배우의 대변인으로 여기기도 하는데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중간에서 모두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입니다. ‘약자의 영웅’도 아니고 ‘정의의 사도’도 아니죠. 또한, 제 개인의 의견을 드러내고 무언가를 결정하는 역할도 아니예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작품, 그리고 장면에 관련된 모든 크리에이터들의 입장을 듣고 전달하고 조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갈비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정식으로 고용한 작품입니다. 모모코 씨의 참여에 대해 한국 배우와 스태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직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 자체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주연을 맡은 여성 배우와는 아주 명확하게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의 작업은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현장에서 특별히 느낀 점이 있다면 조율이 필요한 장면에 관해 물었을 때 한국 배우들은 주로 ‘나는 괜찮다’ ‘다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어요.

 

해외 배우들은 다른가요?

우선 사람마다 성격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만 제 경험에 미루어 말씀드리자면, 일본 배우들은 ‘혹시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이나 설정이 있나요?’라고 물어도 자기 의견을 곧바로 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본 배우와 작업할 때는 아주 세세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장면에서 상대 배우가 손을 잡아도 괜찮나요?’ ‘이 장면에서 키스해도 괜찮나요?’ ‘가슴을 만지는 장면은 이런 방식으로 연기해도 괜찮나요?’ 이렇게 장면을 세분화해서 물어보면 그제야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장면, 혹은 불쾌하다고 느끼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반면 미국 배우들은 특정 장면에 대한 자기 의견, 혹은 촬영 가능 여부를 직설적으로 답하는 편이에요.

 

한국에서는 ‘배우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인식, 예술가로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극한의 경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린 영향인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면에서는 일본도 비슷합니다. 특히 일본에는 핑크 필름이나 V시네마라는 장르가 있는데요.* 이런 장르에서 경력을 쌓아 상업 영화계로 진출한 감독은 배우에게 원하는 기준이 높아요. 나체를 노출하거나 동침하는 장면에 대해 ‘배우라면 할 수 있지 않나’라고 쉽게 생각하죠. 하지만 배우들 입장에서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이렇게 감독과 배우의 인식이 크게 차이 나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입장에서는 고생합니다.(웃음)

*핑크 필름은 정사를 주로 다루는 장르, V시네마는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장르를 뜻합니다. 특히 V시네마는 폭력, 섹스를 다루는 작품이 많아요.

인식 차이가 큰 상황에서도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게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역할인데요. 서로 다른 입장을 조율하는 비결이 있나요?

어떤 현장이라도 커뮤니케이션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감독의 입장, 스태프의 입장, 배우의 입장을 모두 반영해야 하니까요. 대신 이 과정에서 촬영장의 누구도 방해해선 안 됩니다. 일본에서는 ‘공기를 읽는다’라고 표현하는데요. 현장의 공기를 읽으면서 말을 걸어야 하는 타이밍을 잘 보고, 적기에 의견을 전달해요. 무엇보다 감독에게도, 스태프에게도, 배우에게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당신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걸림돌이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특정 장르에서 활동한 감독들은 배우와 이견을 조율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던 경우가 더 많아요. 그래서 저와 작업한 후 오히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통해 작품을 잘 만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장면 장면을 잘 풀어나갈 수 있었다고 말해주는 감독들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지난 3년 반 동안 일본에서 50여개 작품에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는데요. 처음에는 다들 낯설어했지만, 이제는 제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로 참여한다고 하면 먼저 ‘모모코 씨와 상담하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앞서 배우에게는 장면을 세분화해 의견을 구한다고 했는데요. 감독과의 논의는 어떻게 이뤄지나요?

감독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의 감독은 장면을 전체적인 그림으로 구상하거든요. 그래서 감독과 논의할 때도 장면을 잘게 쪼개서 구체적인 의도와 연출 방향을 묻죠. 만약 베드신에 대해 논의한다면 ‘이 부분에서 두 배우가 나체가 되나요?’ ‘단순히 동침만 하는 장면인가요, 아니면 섹스하는 모습까지 촬영하나요?’ 등을 물어요. 그러면 해답이 나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감독에게도, 배우에게도 특정 장면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인식시키는 것 자체도 코디네이터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쉽지 않지만요.(웃음)

 

그만큼 시나리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선행되어야겠어요.

맞습니다. 실제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로서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단계가 촬영 전 준비 기간입니다. 먼저 시나리오를 읽고 키스신, 베드신, 노출 신 등을 찾아 리스트를 만들죠. 이를 토대로 감독과 먼저 이야기를 나눕니다. 각 장면의 의도 등을 묻고, 답변 내용을 배우들에게 전달합니다. ‘이 장면은 이런 의도로 쓰였고, 감독의 의견은 이렇다’고 전달한 후에 배우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죠. 이걸 다시 정리해서 감독에게 보고하고,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다음에는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관련 스태프들과도 내용을 공유해요. 장면에 따라서 특정 색깔의 속옷이 필요하다거나 분장이 필요한 경우가 있거든요.

 

철저한 준비 끝에 촬영 현장에 나가면 어떤 일을 하나요?

준비를 아무리 철저히 해도 촬영 현장에서의 변동이 생기는 건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이 바뀔 수 있고, 또 몸 상태에 따라서 촬영 가능 여부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배우가 촬영 당일에 사전 동의했던 내용을 번복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이를 대비해 촬영 당일에도 사전 미팅을 진행합니다. 일본에서는 단도리(段取り)라고 부르는데요. 특정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 15분 정도 한 번 더 감독과 배우들의 의견을 묻는 시간을 보냅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저를 통해 다시 한번 의견을 나누도록 유도하는 것이죠. 당일에 누군가 의견을 바꾼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15분이면 충분해요. 이 15분이 참 소중합니다. 물론 이런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촬영 스케줄에도 여유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없으면 사람의 마음에도 여유가 없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항상 감독에게 성적이거나 신체 노출이 있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촬영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 달라고 부탁해요.

 

지난해 렛허에 한국에서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육성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지요.

OTT 플랫폼을 보면서 느낀 건데요. 한국 작품에서도 인티메이트한 장면(intimate scene, 성행위를 묘사하거나 신체를 노출하는 장면 등)이 점점 늘어나더라고요. 이전의 한국 콘텐츠들과 비교했을 때 장면의 수위는 높아지는데 아름다움이나 연속성은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 많았어요. 갑자기 과격해졌달까요? 아무래도 OTT 플랫폼의 등장 이후 시청자를 유혹할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증가하는 것이 세계의 흐름이다 보니 한국 콘텐츠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겠지요. 썸네일에 살색이 많이 보일수록 클릭률이 높아지니까요. 이런 현상을 지켜보며 한국에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육성을 위해 운영 중인 홈페이지에 한국어 페이지도 개설했고, 지난해에는 한국영화성평등위원회 든든과 강연도 진행했는데요. 반응은 어땠나요?

실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지망하는 개인의 연락도 받았고, 프로덕션의 연락도 받았습니다. 다만 아직 한국에서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보니 일자리가 없는 상황이에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도 결국은 직업이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어야 하는데요. 지금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있다고 해도 이들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 없기 때문에 우선 직업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역할의 중요성을 알리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웃음)

대중에게 어필하는 데는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네요. 여담이지만, 지난해 한국 배우 유지태 씨가 웹 예능에 출연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언급한 이후 관심을 보인 네티즌들이 꽤 있었거든요. 더 많은 한국인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에 관심을 갖도록 렛허도 노력하겠습니다.(웃음)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필요성을 알리려면 앞서 언급한 오해를 불식하는 것도 중요할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세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커뮤니티의 성비가 궁금합니다. 주로 노출되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성별이 여성이다 보니 이 직업 자체가 특정 성별을 대변하거나, 성차별 및 폭력 방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오해가 쌓인 것도 같아서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국제회의에 갔을 때 만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일본에 활동 중인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도 저를 포함해 3명 모두 여성이에요. 다양한 성별의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앞서 말씀드린 V시네마에 온천을 하거나 나체로 싸우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이런 현장에서는 배우들과 같은 신체 성별을 가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참여하는 것이 배우들에게 더 편할 수 있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로서 앞으로의 계획이나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나요?

일본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도 많습니다. 최근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종합 회사를 설립했어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하라스먼트(Harassment, 사내 괴롭힘), 젠더 컨설턴트, 온세트상담사(On set counselor), 프로덕션 등으로 부문을 나눠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민감한 내용들을 함께 고민하고 설계하는 종합 회사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 배우가 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아니라 온세트상담사가 참여하도록 지원하고요. 영화 홍보 과정에서 은연중에 이뤄지는 젠더 차별의 문제도 전문 컨설턴트가 참여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습니다.

 

끝으로 아시아에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알리고자 분투하는 여성으로서 모모코 씨가 동시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요즘 여성의 말은 하찮게 여기면서 본인은 시답잖은 농담을 일삼는 일부 남자들의 하찮은 조크에 웃지 않아요. 무대응으로 대응하죠.(웃음) 그러니까 여러분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작게 생각하지 마세요. 특히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여성이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위축되는 경향이 있는데요. 여성이니까, 여성이므로 더 당당히 존재해 주세요. 그리고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마세요. 여성으로 살면서 맞닥뜨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서로 손잡고 함께 싸워 사회를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에요.

  • 에디터
    손예지 (yeyegee@lether.co.kr)
  • 통역
    중엽
  • 사진
    박기동
  • 디자인
    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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