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시장에서 자주 쓰이는 ‘여성향’이란 용어의 기준은 무엇일까? 무조건적인 로맨스? 엄격한 도덕적 기준? 어쩌면 ‘여성이 좋아할 만하다’는 말로 또 다른 선입견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레진코믹스 여성향 성인 웹툰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피치 소르베>의 작가 장구는 ‘여성이 좋아하는 것’의 세계는 무궁무진한다고 말한다.
Q <피치 소르베>가 데뷔작인 것으로 아는데, 레진코믹스 상위 랭크는 물론 미국·독일·프랑스·일본 등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어떤 매력이 국내외 독자들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나요?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형제 유라와 유진 사이에서 여자 주인공 모아가 줄타기하는 듯한 설정에서 스릴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또 모아와 유라의 ‘썸’ 타는 과정, 간간이 등장하는 대학 생활을 현실적으로 그린 점에서 공감을 얻은 것도 같고요.
Q 성인용 웹툰으로 데뷔하는 데 부담감은 없었나요?
오히려 여성향 성인물로 데뷔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이유지만 인체를 그리는 실력을 키우고 싶기도 했고, 제 취향의 성인물을 그려보고 싶기도 했거든요. 또 주변에서 성인물을 그린다고 눈치를 주는 환경도 아니어서 성인 웹툰을 그리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다만 인체를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은 아직도 있어서 관련 책을 보면서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Q <피치 소르베>를 추천하는 독자 대다수가 작가님을 ‘인체 묘사 장인’으로 꼽던데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캐릭터들의 매력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최대한 현실적인 선에서 독자들이 생동감을 느끼도록 표현하려고 해요. 캐릭터별로 특징을 꼽자면, 유라는 두터운 몸이지만 둔하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고요. 유진은 의사라는 직업에 맞게 눈에 띄게 불거진 근육 없이 부드러운 체형으로 그립니다. 모아는 작품의 제목인 <피치 소르베>처럼 뽀송하고 또 탄력 넘치는 몸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Q 다양한 체위를 묘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나요?
두 개의 인체가 겹치는 것이라 특별히 더 어려운 점은 없어요. 다만 실제 사진을 참고할 수 없는 영역이라 집에 있는 피규어들로 구도를 잡고 그릴 때가 있긴 해요. 피규어로 자세를 잡다 보면 현타가 오고…(웃음).
Q ‘나와 취향이 비슷한 여자들이 좋아할 작품을 만들자’는 취지로 <피치 소르베> 작업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인데요(웃음). 제가 한참 만화를 보던 시기엔 야릇한 소재가 첨가된 러브 코미디 장르의 작품이 많았어요. 대부분 옛날 일본 만화였죠. 그렇다 보니 남성 중심의 시각으로 그려진 부분도 있었어요. 돌아보면 그땐 그런 작품들을 보는 게 저와 제 또래 친구들의 ‘길티 플레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절 만화를 소비했던 2030 여성 독자 중에도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독자들이 있을 텐데, 발칙한 매력은 살리되 여성의 시각을 더한 작품을 그리면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피치 소르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Q <피치 소르베>의 발칙함은 연애 경험이 없는 모아가 자극적인 남자 유라, 금욕적인 남자 유진과 얽힌다는 캐릭터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각각의 인물을 설계하면서 신경 쓴 점이 있다면요?
흠결을 가진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단점이 있어야 정이 가잖아요(웃음). 단점이 있기에 장점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인물을 설정할 때도 성격의 장단점을 신경 썼는데요. 유라는 건강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지만, 섹스를 쉽게 생각했던 과거를 가졌어요. 유진은 잘생긴 외모와 차분한 성격을 가졌지만, 다소 고리타분한 면이 있고요. 다만 여자 주인공인 모아는 조금 달라요. 화자로서 독자들이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여야 해서요. 장단점을 특정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동갑인 유라에게는 시원하게 할 말 다 하지만, 짝사랑 상대였던 유진 앞에서는 소심해지는 것처럼요.
Q 인터뷰하기 전에 ‘불편한 장면’에 관해 이야기 나눈 게 기억나는데요. 예를 들어 극 중 유라가 모아와의 관계에서 본능이 앞선 언행을 보이는 장면이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그런 장면 다음에는 모아가 불편함을 표현하고, 유라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이 그려지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이런 장면들이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관계의 표본처럼 느껴졌어요.
제 의도대로 해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캐릭터들이 서툴게나마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극 중에서 유라는 섹스 파트너를 많이 거친 친구라 깊은 연애는 잘 몰라요. 그래서 모아를 대할 때도 스스로 몸과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죠. 그럴 때마다 모아에게 배우면서 연애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에피소드들을 만들고 있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이 그려진 것 자체가 불편한 독자들이 있을 수 있어요. 당연합니다. 그래도 유라가 모아로 인해 개선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선 필요한 장면이었어요.
Q 문득 궁금하네요. <피치 소르베>를 작업하는 일이 즐겁나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즐겁지는 않지만…(웃음).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컷을 그릴 때는 즐거워요. 동세가 들어간 장면이나, 주인공들의 체위를 담은, 호흡이 긴 장면들이요. 얼굴을 그리는 데 취약한 편이라 아무래도 인체를 묘사하는 장면이 특히 재미있어요. 또 에피소드가 업데이트되자마자 읽은 독자들이 SNS에 남겨주는 후기를 보는 일도 뿌듯해요. 특히 과몰입한 독자들이 다소 과격한 후기를 남겨주실 때 귀여워요.
Q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여성을 위해 여성이 만드는 섹슈얼 콘텐츠’가 늘어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그래도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성 중심의 콘텐츠가 늘어나는 추세인 것 같은데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이 즐길 만한 성인 콘텐츠의 범위가 더더욱 넓어지기를 바라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이래’ ‘여자들을 위한 작품은 도덕적 기준이 높아야지’ 같은 편견이 무너졌으면 좋겠고요. 여성도 발칙한 작품, 자극적인 작품 만들고 보는 거 좋아하니까요. 앞으로는 여성이 일말의 죄책감 없이, ‘길티 플레저’로 생각 하지 않고, 자기 취향대로 성인 콘텐츠를 만들고 즐기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이미지장구
- 디자인박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