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허가 새롭게 시작하는 Let Her SPEAK는 모든 여성이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할 수 있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기획한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한국에 사는 여성으로서 욕망하고 욕망 당한 역사를 거침없이 서술한 <한녀랩소디>, 함락당함으로 상대를 함락하고자 하는 마음을 솔직히 그린 <흐를 만큼 가득 채워주세요> 등을 펴낸 에세이스트 인주예요. 성(性)을 말하는 것을, 특히 그 화자가 여성이라면 더더욱, 문란하고 불순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에서 인주의 에세이는 제일 처음 성욕을 느낀 순간부터 섹스로 상처받고 치유된 기억까지 세세한 경험과 감정을 소상히 풀어놓습니다. 이토록 솔직한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 펴내는 데 무거운 계기나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지 않았느냐 묻자, 인주가 웃으며 답합니다.
“전혀요. 제가 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하나도 부끄럽지 않거든요”
Let Her SPEAK 의 첫 번째 스피커가 되어준 인주 작가님을 환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의 생애 가장 기억나는 ‘처음’은 무엇인가요?
제가 섹스 토크 모임을 진행할 때 항상 하는 질문이네요.(웃음) 섹슈얼리티에 관한 기억으로 한정하자면 제가 처음 성욕을 느낀 순간이 생각나요. 물론 그 당시에는 성욕인 줄 몰랐지만요. 유치원에 다닐 때였어요. 한 남자 아이가 떨어진 지우개를 주우려고 제 쪽으로 다가왔는데 제가 다리를 벌려서 팬티를 보여줬어요. 이제와 생각하면 ‘나를 봐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누가 누구 좋아한대’라면서 장난치잖아요. 그런데 저는 키도 크고 덩치도 커서 저를 좋아한다는 애가 없었거든요. 성애적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강렬하고 웃기기도 한 첫 기억이죠.
작가님의 또 다른 처음에 대해서도 말해볼까요? 2021년 첫 번째 에세이 <한녀랩소디>를 출간했죠. 여기서 ‘한녀’는 ‘한(恨)이 많은 여자’를 뜻합니다. 여전히 한이 많나요?(웃음)
하하. 한은 계속 많아요. 제 유머는 수치심을 동반하거든요. 사람들이 똥, 방귀 이야기를 우스워하는 것도 그게 어쩐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제가 겪은 수치심을 오히려 재미있게 떠들려고 해요. <한녀랩소디>도 그렇게 쓴 글을 엮은 책이고요. 제가 한 섹스, 저의 성적 지향부터 가족과 친구 이야기까지 담겼죠. 저만의 특수한 경험 같지만, 한편으로 한국 여자라면 한 번쯤 느꼈을 보편적인 감정이기도 해요. ‘그래,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한국에 사는 여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잖아’라는 마음으로 <한녀랩소디>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한녀랩소디>에 묘사된 ‘한국에 사는 여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 중 하나는 부모님에 관한 마음인 것 같아요. 특히 “아빠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면서 아빠는 좋은 남편이 아니지만 나쁜 아버지는 아니다 말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라는 구절은 무척 슬프게 다가왔어요.
엄마도 외할아버지가 가부장적인 것에 불만이 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빠가 잘못을 해도 ‘외할아버지보다는 아빠가 좋은 아빠니까’라는 마음으로 참고 넘겼다고. 아내에게 나쁜 남편은 아이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딸에게 좋은 아버지를 주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이, 되레 저에게 독이 된 것 같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엄마를 이해해요. 엄마도 결국 한이 많은 한국 여자니까.
부모님에 대한 K-딸의 애증은 결국 이해로 귀결되네요.
맞아요. 원망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마음도 분명 크거든요. 그래서 글 쓸 때도 부모님의 귀여운 면을 쓰려고 노력해요.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도 ‘그런데 그때 왜 그랬어?’로 끝나서 그렇지.(웃음)
부모님에 대한 애증도 실은 자식으로서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녀랩소디>는 ‘사랑받고 싶은 여자의 외침’이란 문장으로 설명하고 싶어요. 에세이에서 작가님은 성애적 갈증과 욕망을 거침없이 털어놓습니다.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저는 제가 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부끄럽지 않아요. 오히려 그때 느낀 감정을 끄집어내는 게 힘들죠. 이를테면 원나잇을 하고 옆에 누워 있는 남자 얼굴 보면서 한 생각. 지금 내 옆에 누운 남자가, 중학생 때 내게 ‘줘도 안 먹는다’고 욕하던 남자 동창들보다 몇 배는 낫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챔피언이 된 것처럼 우쭐하던 순간. 어디에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쪽팔린 감정을 드러내는 거, 그게 진짜 솔직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할 수 없을 만큼 쪽팔린 감정’이 <한녀랩소디>를 읽으며 공감한 포인트예요. 실제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한녀랩소디>의 시작은 블로그 연재였는데요. 당시 올렸던 글 중 한 편에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는 내용의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 그 글을 계기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서 제 글만큼 자기 이야기를 길게 쓴 메시지를 받은 적도 있어요. 정말 감사했고, 한편으로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동질감에 짜릿했죠. 물론 정반대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최근에 <한녀랩소디> 중 ‘수치심의 역사’라는 챕터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려졌을 때인데요. ‘수치심의 역사’는 중학생 때 남자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고등학생 때 랜덤 채팅으로 성인 남자를 만나고 스무 살부터 클럽에 다니면서 원나잇을 했던, 그러다 마침내 저를 진짜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저의 섹슈얼리티 역사를 담은 글이에요. 순식간에 댓글이 100개, 200개씩 달리더라고요. ‘남미새(남자에 미친 사람)’라거나 ‘왜 저렇게까지 남자의 애정을 구걸하며 사냐’ ‘페미니즘을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러냐’라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웃음)
부정적인 피드백은 어떻게 수용했나요?
처음엔 억울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남미새’가 아니라 성애에 미쳐 있는 사람이거든요. 나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의 사랑도 받고 싶은 사람인데! 하하. 하지만 욕먹은 이유도 잘 알아요. 너무 잘 알아서 <한녀랩소디>가 창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르잖아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바뀌는 존재니까요. <한녀랩소디>는 어린 날의 제가 쓴 제 이야기이고, 앞으로는 또 다른 시각으로 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에세이에 대한 반응은, 작가의 삶에 대한 피드백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사람들은 아마 ‘수치심의 역사’의 결론이 다르기를 기대했을 거예요. ‘문란하게 살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난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이제 타인의 애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안다’라고 말하는 결말이요. 하지만 에세이는 소설이 아니예요. 모두의 인생이 ‘사이다 결말’을 맞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수치심의 역사’를 지나온 덕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기대한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또 글로써 풀어 보려고 해요. 래퍼들이 랩으로 승부 보는 것처럼 작가는 글로 써 와야죠.(웃음)
최근에 발표한 <흐를 만큼 가득 채워주세요>는 ‘함락 페티시’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상대에게 함락당하는 데 성욕을 느끼는 본능’과 ‘상대와 동등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섹스할 자유’가 충돌하는데,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지향하면서 성적 취향을 추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인가?
예전에는 여성에게 강요되는 성 엄숙주의에 맞서는 의미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게 페미니즘의 일부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포장한 거죠. 그렇다고 정말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면서. 생각할수록 어려운 문제예요. 음, 배윤민정 작가님이 쓴 글이 떠오르는데요. “여성의 감각마저도 성차별적인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여성의 몸은 전쟁터’라는 슬로건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A 옆에 있는 지금, 나는 내 몸이 전쟁터가 아니라 놀이터 같다”*라는 구절이요. 우리는 항상 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여성으로서 주체성을 갖고, 정치적이고 올발라야 한다는 책임감과 욕망 사이에서. 중요한 건 이런 고민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거란 사실이에요. 어떤 선택을 하고 욕망을 갖든 정답은 없지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스스로 물어보고 자기 역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윤민정, 「My Sexuality: 나에게서 나를 제외하면」 (https://brunch.co.kr/@cheongori/46)
<한녀랩소디> <흐를 만큼 가득 채워주세요>를 쓰는 일도 작가님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을 텐데요. 시간을 돌려 작가님의 글 속, 어린 날의 작가님을 마주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요?
이런 상상은 많이 해봤어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무척 부러워할 거예요. ‘저 언니는 살집이 있지만, 뚱뚱하지 않고 그래서 예쁜 옷도 골라 입고 애인도 있고 사랑도 받고 섹스도 해봤잖아!’ 하고. 반대로 지금의 내가 그 아이를 보면… 짠해요.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제가 그린 만화가 있는데요. 거기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기 때 나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다리도 두껍고 배도 뚱뚱해’ 어린아이가 이런 생각을 한다니, 처절하고 안쓰럽더라고요. 그래도 ‘너의 몸은 소중해. 너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야’ 이런 말은 안 할 거예요. 실제로 어릴 때 주변에 이런 말을 해주는 좋은 어른이 없었던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괜찮아.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 똑같이 느끼는 사람 엄청 많아. 지금의 네가 어떻든 크면 잘 먹고 잘산다’라고. 그리고 밥 한 끼 사 줘야죠.
아까 잠깐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여성이 성적으로 자유를 갖는다는 것, 성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답은 없지만, 지금의 제가 생각하는 건 ‘뭐든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거예요. 요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건데, 섹스 경험이 많다고 ‘나는 문란해’ 자책할 필요 없고 섹스 경험이 적다고 ‘난 지금까지 너무 재미없게 살았어’ 부채감을 가질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섹스에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요.
죄책감도, 부끄러움도 느낄 필요 없다는 말씀이죠. 정말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끝으로 동시대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울지 말고 일어나 노래를 부르자’ 살면서 나에게 너무 크고 무거운 일들이 찾아올 때가 있잖아요. 그런 일을 말로 꺼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요. 왜, 고등학생 때 혼자 힘들어하면서 일기에 적은 ‘죽고 싶다’는 처절한데 친구들에게 한탄하면서 뱉는 ‘죽고 싶다’는 말은 농담이 되어버리는 것처럼요. 지금 여러분을 아프게 하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들은 여러분만의 아픔이 아닐 수 있어요. 힘든 일을 반복해서 말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말로 자꾸 끄집어냄으로써 여러분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라요. 무엇보다 지금 겪는 고통을 소화하든, 소화해내지 못하든 스스로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에디터렛허 (info@leth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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