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편안하고 안전하고, 즐겁게 머물 공간이 절실한 요즘, 각기 다른 장소에서 여성을 환대하는 네 곳을 소개한다. 그 첫 번째 공간은 서울시 홍대입구역 5번 출구 인근에 위치한 신여성.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등을 쓴 배윤민정 작가가 운영하는 여성 전용 공유 작업실이다. “글을 쓰는 일이야 말로 비로소 내가 서 있을 자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는다는 배윤민정 작가를 만나 신여성의 오픈부터 지금까지, 그 역사를 들었다.
Q 신여성의 출발이 궁금합니다.
신여성은 2019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전에 이용하던 여성 전용 작업실 씀씀이 문을 닫으면서 제가 뒤이어 신여성을 차렸죠. 여성 전용 작업실은 글 쓰는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작업하는 데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에요. 서로에게 의지도 많이 하고요. 그런 공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제가 직접 신여성을 열게 되었어요.
Q 특히 ‘여성 전용 공간’이라는 말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요즘이에요.
신여성을 만든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한데요. 2018년에서 2019년, 신여성을 오픈할 즈음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부상했습니다. 그중에는 예술계, 특히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 운동도 활발했죠. 저 역시 문예창작과를 나온 터라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폭로되는 일들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일련의 일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사회적으로 성 평등한 창작 공간, 또 관련 프로그램을 교육할 만한 공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Q 신여성의 공간을 소개해 주세요.
우선 메인 공간에는 개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자리가 8개 있어요. 독서실처럼 정숙이 필수인 공간은 아니지만, 서로의 작업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어요. 신여성에서는 글 쓰기 외에도 논문 작성, 재택 업무, 웹툰 작업 등 책상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무엇이든 해도 됩니다. 일기를 쓰러 와도 좋아요! 그리고 작업실 안쪽에는 10명이 모일 수 있는 세미나실이 있는데요. 매주 작업 모임, 창작 워크숍, 세미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신여성의 공간을 꾸미는 데 특별히 신경 쓴 점이 있나요?
들어와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는 감각을 느끼기를 바랐어요.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의도한 이유죠. 이를 위해 원목 가구들을 직접 사서 배치하기도 했고요. 한편으로는 신여성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레트로 감성도 살리려고 했는데요. 단순히 그 독특한 무드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모욕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우리 역사 속의 ‘신여성’들을 기억하고 그 명맥을 잇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공유 작업실은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간이라 운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용자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여성들의 엄청난 도덕성에 놀랐죠. 그보다는 홍대입구역 근처라는 지역적 특성상 끝없이 치솟는 임대료가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웃음)
Q 신여성을 이용하려면 원데이/정기/주말 멤버십을 구매해야 하는데요. 최근 자율요금제 ‘하고 싶은 만큼, 내고 싶은 만큼’을 도입해 3개월간 운영했다고요?
우리 일상 속 많은 공간이 돈을 내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게 되어간다는 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어요. 자본력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 제약이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이로 인해 특정 공간에서 형성되는 커뮤니티에 접근조차 못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도 큰 문제예요. 신여성만이라도 더 많은 여성이 편히 오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죠.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하고 싶은 만큼, 내고 싶은 만큼’입니다. 기존의 멤버십과 달리 이용자 본인이 원하는 만큼, 가능한 만큼 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방식인데요. 지난 8월에 도입해 10월까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마음을 내어 주셨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신여성을 자주 찾지 못하던 분들도 편하게 방문해 주셨고요. 어떤 분들은 그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응원의 뜻으로 후원을 해 주셨어요. 무척 감동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를 상시 운영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요. 앞으로 1년에 1분기 정도, 시즌제의 형태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Q 신여성은 작업 공간이자 창작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킹 공간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커뮤니티성, 신여성이 갖고 있는 큰 강점이죠. 실제로 신여성에서 만난 인연으로 함께 창작 활동을 하는 분들도 많아요. 실제로 저는 신여성에서 진행한 자본-여성-기후 세미나를 통해 9명의 작가와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라는 에세이집을 썼어요. 작년에는 신여성 멤버 중 연출가,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공연 <계산서: 이머시브 리터러처>를 만들기도 했고요. 지금은 K팝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를 준비하는 분들이 있어요. 창작이라는 게 고립된 환경에서 이루어지기 쉬운데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작업하면서 서로 고민도 나누고,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아요.
Q 신여성에서는 다양한 창작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그중 창작 워크숍 <소리내어 글쓰기>는 2020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요.
짧은 시간 동안 즉흥적으로 글을 쓰고, 이를 함께 낭독하며 이야기 나누는 프로그램이에요. 이 과정에서 자기 검열을 해체하고 내면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유로운 글 쓰기를 지향하자는 게 <소리내어 글쓰기>의 취지입니다. 실제로 이 모임에서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아요. 저 역시도 많이 울고요.(웃음) 한 분은 이런 후기를 남겨 주셨어요. “부정적이라고 평가되어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이 말과 글이 되는 순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수용과 이해한다는 표정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구나’ 혹은 ‘이상해도 상관없구나’라고 위로받는다. 위태로운 한 주를 지낸 이야기를 더듬더듬 풀어놓았을 때 함께 울어준 글쓰기 모임 사람들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다.” 글이라는 매개, 신여성이라는 공간이 없었다면 이렇게 타인 앞에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Q 글 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실제로 글을 써본 적 없다는 분들도 많이 오시는데요. 다들 처음에는 엄청나게 걱정하는데 막상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면 ‘어쩜 이렇게 다들 잘 쓰지?’하고 놀라요.(웃음) 정말이에요. 대개 20대부터 40대까지 여성들이 신여성에 찾아와 주시는데요. 그들의 글을 보면 이 세대야말로 자기 삶의 내적 논리들을 갈고 닦은 세대가 아닐까, 싶어요. 그만큼 글을 참 논리 정연하게 잘 쓰시거든요. 그러니 두려워 말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Q 역사적으로 여성에게는 글을 쓸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글자를 배우는 것도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고, 자기가 쓴 글을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성별을 감추거나 다른 사람인 척해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죠. 이런 맥락에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러 답이 있을 텐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글 쓰기란, 사회적으로 내가 있을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에요. 언제나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사람은 중장년의 남성들이었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요. 하지만 그들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역사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 중 하나는 소수자들에게서 나와요. 사회가 소수자, 약자들에게 마이크를 쥐여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기 삶을 기록하고 발화해야 해요. 그렇게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죠. 그래서 더 많은 여성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 신여성이 여성에게 어떤 공간이 되기를 바라나요?
안전하고 자유롭게 창작하는 공간, ‘나를 받아들여 주는 공간’이고 싶어요. 그래서 가능한 오랫동안 이 자리에서 많은 여성을 만나고 싶습니다. 또 가능하다면, 다른 지역에도 신여성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Q 끝으로, 누구라도 좋습니다. 신여성에 초대하고 싶은 여성 한 명을 꼽아주세요.
음, 어렵네요.(웃음) 실제로 만나고 싶었던 여성들은 이미 신여성에서 함께 작업하는 사이가 되었거든요. 그럼, 현실에서 불가능한 분을 꼽아볼까요? 지금 떠오르는 인물은 이선희 작가입니다. 1930~40년대 활동한 여성 소설가로, 당대의 ‘신여성’이었어요. 6·25 전쟁 전에 월북한 터라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선희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그 세련된 감수성과 서늘한 문체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나요. 한편으로 이렇게 문학적 성취가 훌륭한 작품을 여성 작가의 글이라는 이유로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다는 데 원통함도 느꼈고요. 이선희 작가는 생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술을 파는 가게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요. 그러자 다른 남성 작가가 ‘아주 미치지 않았다면야 타락을 해도 저 지경까지야 할 리가 있나’며 이선희 작가를 비난했다고 해요. 이선희 작가는 월북 후, 30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어요. 만일 이선희 작가에게 경제적인 안정이 보장되고, 정서적 지지를 보내줄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얼마나 더 훌륭한 작품 세계를 보여줬을까? 할 수만 있다면 이선희 작가를 신여성에 모시고 싶네요.
주소 서울 마포구 신촌로2길 5-14 2층
문의 https://litt.ly/newwoman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권성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