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서울에서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가 열렸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성 코미디언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 공연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 매진됐죠. 여성들의 경험과 욕망, 불편함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무대를 기다려온 관객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일 겁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여성 코미디언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그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바로 정성은, 서촌코미디클럽 대표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작가, 영상 PD로 동분서주하는 그는 최근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 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창작자 중 한 명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그의 첫 번째 에세이 <궁금한 건 당신>을 읽었습니다. 택시 기사, 세탁소 사장, 이삿짐센터 기사처럼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대화 산문집이었죠. 책을 덮고 나니,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정성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다가오는 6월 14일 <영희 페스티벌>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앞둔 정성은을 만났습니다.

작가이자 PD, 기획자이자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렛허 독자들에게는 어떤 사람으로 소개되고 싶나요?
요즘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가장 열심히 하고 있어서요. 스탠드업 코미디언 겸 작가라고 소개하고 싶네요. 8월쯤 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인 책도 있고요.
안 그래도 만나기 전 첫 번째 에세이 <궁금한 건 당신>을 읽었습니다. 택시 기사님, 세탁소 사장님, 이삿짐 센터 기사님처럼 일상에서 그저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인연들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들의 인생을 인터뷰한 대화 산문집이라 새로웠는데요. 읽고 나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 있어요. 처음 만난 사람의 마음을 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요?
시간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은 한 시간 반 정도 대화하면 글이 나올 만큼의 이야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좀 슬프네요.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되게 빨리 열 수 있는데, 오히려 역사가 있는 관계들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웃음)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 사람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나요?
스몰토크를 하다가 뻔하지 않은 대화가 시작될 때요. 제가 잘 모르는 삶의 이야기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생각, 그리고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진짜 언어’들을 들을 때면 귀가 번쩍 뜨이곤 해요.
최근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제 인터뷰 영상을 찍으면서 여러 감독님들을 만났는데요. 그중 박세영 감독님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따로 인터뷰 요청을 했어요. 영화제에 참여한 거장 감독님들 중 가장 어리기도 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를 끝없이 풀어낼 수 있는 에너지가 느껴졌거든요. 무엇보다 인터뷰 중에 사소한 돌발 상황들이 있었어요. 뒤에 붙은 포스터가 떨어지거나 미화원분이 바닥을 닦으며 계속 저희 쪽으로 다가오시는… 보통은 흐름이 끊겼다며 정돈하고 다시 시작하기 마련인데, 그분은 오히려 “근데 이것도 영화 같지 않아요?”라며 흥미로워하시더라고요. 그런 열린 태도를 봤을 때, 거기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면 저는 제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 궁금한가 봐요. 늘 내 문제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요즘 뭘 붙들고 사나 싶어서, 인터뷰 하면 거의 “요즘 무슨 생각 제일 많이 하세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편입니다.

그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영향을 줄까요?
그건 또 달라요. 크라우드 워크라고, 스탠드업 코미디 중 관객과 즉흥적으로 대화하는 문화가 있는데 그건 호기심보다는 순발력이 중요해요. 솔직히 안 궁금한데 물어보는 경우도 많고요.(웃음) 반면 인터뷰는 진짜 진솔한 대화예요. 그래서일까요, 인터뷰할 때 제가 더 좋은 사람 같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때는 문제가 많은 사람 같기도 해요.(웃음) 코미디는 결국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들, 꼬집고 싶은 것들을 소재로 삼게 되거든요.
실제로 스탠드업 코미디에는 로스팅* 문화도 있죠. 서로를 놀리며 웃기는 양식 자체가 ‘선 넘기’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최근에 로스팅 공연을 하면서 배운 게 있어요. 무대 위에서 상대 코미디언이 던진 농담을 받아치기 위해, 그 대화의 밑바탕에 깔린 팩트를 짚어내는 리액션을 했거든요. 저는 무대 위의 가벼운 티키타카라고 생각해서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에게는 그 부분이 치부였더라고요. 제가 깊이 헤아리지 못했던 거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 록이 농담을 던졌다가 윌 스미스에서 뺨을 맞았던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서로의 약점을 놀림으로써 웃음을 주는 스탠드업 코미디 문화
진실을 말했을 때 터지는 웃음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기도 하죠.
맞아요. 더군다가 페미니즘 기반으로 코미디를 하다 보니 점점 “내가 누군가를 상처 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도 커져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남성 연예인의 사건을 농담의 소재로 삼을 때가 있는데요. 분명 그 사람이 잘못한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온 세상에 그 사실이 낱낱이 파헤쳐 지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안타깝다는 생각도 드니까요. 그 사람에게는 숨기고 싶은 치부일 텐데 내가 그것을 또 드러내는 게 맞는지, 나아가 ‘이 농담을 그의 가족이 들으면 상처받을까?’ 하는 생각까지 꼬리를 물게 돼요.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관객 반응이 정말 좋았던 클립 영상조차 SNS에 업로드하기 전에는 망설이고 주저하게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스탠드업 코미디를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신에 있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너무 훌륭하고 재밌어서요. 소개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동시에, 솔직히 가성비는 좀 떨어져도 제가 하는 활동들이 여성 해방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지난 3월 8일 열린 여성의 날 기념 공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모아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타이틀의 공연을 열었죠.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작년에 열린 여성의 날 기념 공연에 참여했는데요. 그 공연에서 처음으로 “내가 코미디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직은 스탠드업 코미디 신에서 여성의 입지가 좁고, 제 농담에 남성성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다 보니 남성 코미디언들이 주를 이루는 오픈마이크 무대에 서면 저도 모르게 위축될 때가 많았어요. 마치 흑인 코미디언이 백인 코미디언과 관객들로만 가득한 무대에 올라가 백인 사회를 풍자하는 농담을 던질 때 느낄 법한, 그런 묘한 긴장감과 압박감 같은 거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계속 검열하고. 그런데 여성 관객들과 함께하는 무대에서는 제 언어가 온전히 통한다는 해방감이 들면서 너무 자유롭고 유쾌하게 무대를 즐길 수 있었어요. 이 감각을 다른 여성 코미디언들도 느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획하게 됐죠.
또, 스탠드업 코미디는 흔히 웃기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 너머를 보고 싶은 사람인데요. ‘이 이야기가 세상에 전달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여성 코미디언들은 온몸으로 답을 하고 있어요. 물론 여자들이 더 웃기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단순한 유머를 넘어 어떤 메시지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죠. 그렇기에 기획자로서 공연을 더욱 자랑스럽게 만들고, 세상에 추천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공연 기획 전반을 주도하면서 부담도 컸겠어요.
전혀요. 14명의 페미니스트 코미디언 동료들이 함께해 주었고, 각자 할 일을 나눠 부담했거든요. 제 고민은 오직 “어떻게 하면 플레이어들의 기량을 최대로 올릴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었죠. 사실 제가 평소에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무대에 오르는 타입이 못 되거든요.(웃음) 돌이켜보니 저는 늘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큰 창피를 당할 때’처럼,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판이 깔렸을 때 해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배수진을 쳤어요. 코미디언들이 사전에 서로 대본을 공유하며 피드백을 주고받게 했고, 온라인으로 진행한 리허설에는 기자님들까지 초대했습니다. ‘남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어떻게든 더 잘하겠지’라는 마음도 있었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여성의 날 당일에 기사가 나가야 하는데, 정작 기자님들은 당일 공연을 보지 못하고 글만 쓰셔야 하는 게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리허설이라도 직접 보고 생생하게 써달라”고 요청드리기도 했습니다.
관객들도 여성들의 코미디를 많이 기다렸나 봐요. 티켓 예매창이 열리자마자 매진됐죠. 현장 반응은 어땠나요?
실제로 거의 다 여성 관객이었고, 반응도 진짜 좋았어요. 공연 클립을 인터넷에 올렸는데 그것도 반응이 너무 좋아서 재밌었고요.

앞으로 예정된 공연들도 궁금해요.
가수 오지은 님이 만드는 여성 페스티벌 <영희 페스티벌>에 참여해요. 선우정아, 김윤아, 이상은 님 등 여성 가수들이 무대에 서는 페스티벌인데 6월 14일, 마지막 날에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도 열리거든요. 여러분이 아실 만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중에는 원소윤 님의 팀이 함께하고요. 저도 ‘정성은과 굉장한 여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좋아하는 코미디언들─전성진, 강안리, 최기문, 정윤지, 서서희─과 함께 무대에 설 예정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기획자로서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한 명의 관객이자 여성으로서 그게 참 고마우면서도 힘들겠단 생각이 드네요.
저만 아니라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언 대다수가 같은 마음인 것 같아요. 저는 사실 플레이어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은 크지 않아요. 그보다는 저를 통해서 많은 여성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아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죠. 최근에 넷플연가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클래스를 운영한적 있는데 그때도 코미디를 ‘가르친다’기 보다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게 만드는 데 초점을 뒀어요. 실제로 클래스 참여자들이 자기 이야기로 코미디를 만들고 관객들이 웃어주는 경험을 통해 “인생에 남을 하이라이트”를 얻었다고 표현하더라고요. ‘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여성들이 있다면 그냥,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도전해 봤으면 좋겠어요.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코미디 공연을 볼 때 항상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이게 넷플릭스에 올라갈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웃긴 이야기와 시간이 지나도 남는 이야기는 다르잖아요. 여성 코미디언들의 이야기에는 후자가 꽤 많다고 느껴요. 그래서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에 거는 기대가 크고, 저 역시도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출간을 앞둔 두 번째 책 <치부 노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까요? 제목이 독특해요.
아까 잠깐 ‘치부’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요.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때, 타인이 아니라 제 스스로의 치부를 소재 삼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래도 그게 ‘덜 위험하다’고 느끼는 거죠. <치부 노트>에는 그런 이야기를 적었어요. 다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한 척 살아가지만, 정작 속으로는 밤새 골몰하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반복적인 문제들이요. 처음에는 제 치부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게 너무 창피하기도 했어요. 엄마, 아빠도 “그거 책으로 내지 마라”고 하시고요.(웃음)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게 제 인생인데.

마지막 질문이에요. 앞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통해 ‘여성 해방’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요. 성은 님이 생각하는 ‘여성 해방’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외모 정병’을 겪지 않고, 정상성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요. “남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란 의심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 에디터손예지 (yeyegee@lether.co.kr)
- 사진요망진스튜디오